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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호의 월드컵 파일] 고통의 90분, 벤치에서 마주한 ‘축구 인생의 겨울’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조별리그 A조 2차전 한국-불가리아
아르헨티나와 1차전 선발 후 벤치 신세...후보들의 고통 깨달아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조별리그 A조 2차전에서 한국과 불가리아는 수중전을 펼친 끝에 1-1 비겼다. 김종부의 동점골이 터진 순간의 경기 장면./FIFA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조별리그 A조 2차전에서 한국과 불가리아는 수중전을 펼친 끝에 1-1 비겼다. 김종부의 동점골이 터진 순간의 경기 장면./FIFA

[더팩트 | 최순호 전 국가대표] "평생 처음 마주한 낯선 소외, 멕시코의 찬 바람"

1986년 6월, 멕시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치러진 아르헨티나와의 조별리그 1차전(1-3 패)은 한국 축구의 매운맛을 세계에 알린 무대였지만, 내게는 뼈아픈 시련의 서막이었다. 당대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재목이라는 과분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아르헨티나전 직후 내게 찾아온 공기는 차갑고 낯설기만 했다. 조별리그 2차전인 불가리아전을 앞두고 진행된 회복 훈련과 전술 구상 과정에서, 나는 점차 주전 라인업의 중심축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서늘한 기운을 감지했다. 동료들이 땀방울을 흘리는 그라운드의 중심에서 한 걸음 비껴 서 있는 느낌, 팀의 유기적인 움직임 속에서 은연중에 배제되고 있다는 소외감은 이내 지독한 불안감이 되어 내 마음을 짓눌렀다.

불가리아전 당일, 전광판의 시계가 돌아가는 동안 내가 머물러야 했던 곳은 그라운드가 아닌 벤치의 딱딱한 의자였다. 고등학교 2학년 이후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야말로 내 축구 인생에서 처음 마주한 ‘낯선 소외’였다. 1985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1차 예선 당시 잠시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적은 있었으나, 경기가 시작되어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단 1분도 잔디를 밟지 못한 채 90분을 통째로 흘려보낸 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1986년 6월 6일(현지시간 6월 5일) 현충일에 열린 경기에서 한국은 자신감을 가지고 불가리아를 괴롭혔다. 가능성은 낮지만 16강 진출을 위해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경기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전반 11분만에 불가리아에게 선제 득점을 허용했다. 대표팀은 포기하지 않았고 후반 15분 김종부의 터닝슛으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우리는 사력을 다했지만 불가리아의 골문을 더 열지 못했고 경기는 1-1로 종료된다. 결과는 아쉬웠지만 월드컵 첫 본선 진출후 4경기만에 얻은 소중한 승점 1점이었다.

골문을 정조준하며 돌격해야 할 스트라이커에게 벤치에서 보낸 90분은 숨이 막힐 듯 무겁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동료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과 타오르는 갈증이 교차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 후 언론에서는 ‘아르헨티나전 부진에 따른 문책성 선발 제외’라는 날 선 보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에 새겨진 태극마크의 무게만큼이나, 벤치를 지켜야 했던 나의 고독과 심리적 타격은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깊은 내상으로 남았다.

"조장(助長)의 아픔이 남긴 유산, 타인의 슬픔을 읽는 눈"

"한 분야에서 정점에 섰던 이에게 추락의 경험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세계관의 확장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의 말처럼,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에 찾아온 시련은 축구인 최순호라는 사람의 깊이를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비정하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훗날 내가 현역 은퇴 후 지휘봉을 잡고 지도자의 길을 걸어갈 때 가장 강력한 자양분이자 나침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느꼈던 고통은 한자성어 조장(助長)의 우화와 닮아 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 上) 편에 나오는 조장(助長)은 곡식이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안달이 나 뿌리를 뽑아 올린 송나라 사람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당장 눈앞의 성과나 전술적 필요에 의해 선수를 소모하거나, 단 한 경기만으로 선수의 가치를 재단해 마음의 뿌리를 흔들어버리는 행위가 선수에게 얼마나 큰 치명상을 입히는지를 나는 온몸으로 겪어낸 셈이다.

주전 선수들의 화려한 골 세리머니와 승리의 환호성 뒤에는 항상 묵묵히 벤치를 지키며 쓰디쓴 눈물을 삼키는 ‘보이지 않는 다수’가 존재한다. 나는 불가리아전의 아픔을 통해 비로소 그들의 타들어 가는 심정과 소외감,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기다리며 느껴야 하는 불안감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늘 주인공으로만 살아왔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그늘진 곳에 선 이들의 심리학’을 멕시코의 벤치에서 독학한 것이다.

"눈물 젖은 빵이 만든 지도자 최순호"

감독으로서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빛을 살피고, 주전에서 밀린 후보 선수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데 매진했던 배경에는 바로 1986년의 그 ‘무거웠던 90분’이 있었다. 현대 축구는 갈수록 고도화된 데이터와 전술적 일관성을 요구하지만, 결국 그 전술을 수행하는 것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팀의 승리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벤치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선수가 없도록 마음을 살피는 것은 감독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는 것을 나는 뼈저리게 배웠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기행'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고 했다. 내게 1986년 불가리아전은 눈물 젖은 빵이었고, 스트라이커로서의 자존심에 가해진 가장 아픈 채찍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픔을 원망과 좌절로 끝내지 않고,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공감의 렌즈’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했다. 벤치에서의 길고 고통스러웠던 기다림은, 나를 단지 ‘골을 잘 넣는 공격수’를 넘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로 성장시킨 가장 소중한 축구 인생의 유산이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조별리그 A조 2차전에서 한국과 불가리아는 수중전을 펼친 끝에 1-1 비겼다. 김종부의 동점골이 터진 순간의 경기 장면./FI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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