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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오버뷰] 흑인 해방구 '바파나 바파나' 남아공...방심은 곧 '잔혹사'
‘바파나 바파나’의 역동성, 한국축구와 먼듯 가까운 이웃
쿠칭에서의 청소년팀 첫 조우, '판단 미스'가 남긴 뼈아픈 교훈


남아공 축구대표팀 스쿼드. 지난해 12월 모로코에서 열린 아프리카네이션스컵 B조 조별리그 앙골라전에 앞서 선발로 나서는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말라케시(모로코)=AP 뉴시스
남아공 축구대표팀 스쿼드. 지난해 12월 모로코에서 열린 아프리카네이션스컵 B조 조별리그 앙골라전에 앞서 선발로 나서는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말라케시(모로코)=AP 뉴시스

거대한 대륙, 뜨거운 열정의 2026 북중미 월드컵이 마침내 6월 11일 막을 올립니다. <더팩트>는 전 세계 축구 축제의 이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치는 새 연재 [월드컵 오버뷰]를 신설합니다. 단순한 승패와 피파랭킹이라는 숫자의 함정을 넘어, 그라운드 위 베테랑들의 묵직한 서사와 철저한 전술 분석, 숨겨진 팩트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겠습니다. 20년 만에 돌아온 전통 강호 체코의 숨은 칼날을 분석한 이영규 전문기자의 첫 분석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의 위대한 도전과 월드컵의 모든 것을 생생하게 독자 여러분께 배달합니다.<편집자 주>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스포츠는 때로 기록보다 기억으로 각인된다. 한국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상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의 이름을 들었을 때, 올드 축구팬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는 단연 ‘쿠칭’일 것이다.

시간을 29년 전으로 돌려보자. 1997년 열대의 말레이시아 쿠칭에서 열린 U-19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당시 아시아를 호령하던 한국 청소년대표팀의 첫 상대가 바로 축구 변방으로 통하던 남아공이었다. 결과는 0-0 무승부. 후반 막판 공격수 3명과 골키퍼 1명이 맞선 완벽한 기회에서 볼을 몰고 들어가던 공격수가 동료에게 패스하지 않고 직접 골 욕심을 부리다 골키퍼에 막힌 판단 미스는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당시 남아공 감독은 지치지 않고 뛰는 한국 선수들을 향해 "로봇이 축구하는 것 같았다"는 감탄이 섞인 평을 남겼다. 하지만 칭찬이 아니었다. 정해진 패턴 외에는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조롱 섞인 뼈아픈 비평이었다. 결국 첫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 못한 한국은 조별리그 남은 경기에서 앙리가 이끄는 프랑스에 2-4, 브라질에 3-10 굴욕적 대패를 당하며 고개를 숙여야했다. 한국 축구와 남아공의 첫 만남은 그렇게 깊은 잔상을 남겼다.

하지만 한국 축구는 언제까지나 ‘로봇’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22년이 흐른 2019년 폴란드 U-20 월드컵에서 다시 만난 남아공과의 일전은 한국 축구의 진화와 세대교체를 증명하는 완벽한 무대였다. 당시 18세의 나이로 ‘막내형’이라 불린 이강인은 한국 축구에 부족했던 압도적인 ‘창의성’을 그라운드에 불어넣었다. 한국은 F조 조별리그에서 남아공을 1-0으로 제압하며 복수에 성공했고, 기세를 몰아 역대 세계대회 최고 성적인 ‘준우승 신화’를 썼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남아공의 최전방에서 한국의 수비진을 괴롭히던 ‘공격의 핵’이 바로 현재 남아공 성인 대표팀을 이끄는 라일 포스터(번리)였다는 사실이다. 폴란드의 격전지에서 창을 겨누었던 청춘들이 이제는 월드컵 본선이라는 가장 거대한 무대에서 완전한 에이스가 되어 다시 조우하게 된 셈이다.

2019 FIFA U-20 월드컵 F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남아공을 1-0으로 꺾은 한국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이강인(맨 가운데)을 껴안고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티히(폴란드)=KFA
2019 FIFA U-20 월드컵 F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남아공을 1-0으로 꺾은 한국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이강인(맨 가운데)을 껴안고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티히(폴란드)=KFA

◆ 서로의 안방에서 맞이한 전성기, 묘한 평행이론

이후로도 양국의 월드컵 도전사는 묘하게 닮은 꼴로 얽히며 각자의 전성기를 완성해 나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남아공은 한국 땅(대구)에서 슬로베니아를 제물로 역사적인 월드컵 본선 첫 승을 거두며 축제 분위기를 만끽했다. 비록 파라과이에 다득점에서 단 1골이 밀려 아쉽게 16강 문턱에서 좌절했지만, 그들이 세계 무대에서 보여준 경쟁력은 강렬했다.

8년 뒤인 2010년에는 무대를 남아공으로 옮겨 양국의 처지가 대조를 이뤘다. 이번엔 한국이 남아공 땅에서 그리스를 완파하는 등 호쾌한 레이스를 펼친 끝에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반면 개최국 남아공은 프랑스를 꺾는 저력을 선보이고도 골득실에 밀려 역사상 최초로 ‘개최국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참으로 먼 듯하면서도 서로의 안방에서 가장 눈부신 순간을 주고받은, 묘한 평행이론이었다.

한국의 세번째 상대 남아공의 공격수 라일 포스터가 지난해 12월 모로코에서 열린 아프리카네이션스컵 앙골라전에서 골을 터뜨린 뒤 뒤풀이를 하고 있다. /말라케시(모로코)=AP 뉴시스
한국의 세번째 상대 남아공의 공격수 라일 포스터가 지난해 12월 모로코에서 열린 아프리카네이션스컵 앙골라전에서 골을 터뜨린 뒤 뒤풀이를 하고 있다. /말라케시(모로코)=AP 뉴시스

◆ 백인들의 '럭비', 흑인들의 해방구였던 '축구'

남아공 축구는 대단히 깊은 문화적 서사를 품고 있다. 럭비가 과거 남아공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다면, 축구는 철저히 흑인들의 스포츠였다.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축구는 흑인들에게 단순한 공놀이가 아닌 거대한 저항 문화이자 해방구였다. 그렇게 축구는 남아공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압도적으로 흑인 선수들의 비율이 높은 대표팀 구성이다.

오늘날 벨기에 출신의 노련한 사령탑 휴고 브루스 감독이 이끄는 남아공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위에서 전력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격수 라일 포스터(번리, 잉글랜드), 타펠로 마세코(리마솔, 키프로스), 수비수 이메 오콘(하노버 96, 독일), 미드필더 사무켈레 카비니(몰데, 노르웨이),스페펠로 시톨레(톤델라, 포르투갈) 등 비록 빅리그 소속은 아니지만 젊고 역동적인 유럽파들이 공수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브루스 감독은 현재 가장 폼이 좋은 유럽파들과 올랜도 파이리츠와 마멜로디 선다운스 등 자국 명문 구단 주축 리거들을 조합해 탄탄한 공수 밸런스를 구축했다. 대표팀의 별칭인 ‘바파나 바파나!(Bafana Bafana, 소년들이여 나가자!)’에 걸맞은 역동성이 이들의 무기다.

◆ 남아공의 고지대 어드밴티지? 다행히 격전지는 저지대

객관적인 전력상 남아공은 A조 최약체로 분류되지만, 휴고 브루스 감독 아래서 다져진 자국 리거 중심의 조직력과 높은 점유율을 바탕으로 한 공격 축구는 받아치기 까다롭다. 여기에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변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고지대 적응력’이다. 남아공 자국 리그의 중심지이자 대표팀의 산실인 요하네스버그와 프리토리아는 해발 1500m 안팎에 달하는 고원 지대다. 희박한 공기 속에서 매주 숨을 헐떡이며 단련된 이들의 심폐 지구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그러나 반전은 여기서 시작된다. 다행히도 이번 3차전이 치러질 멕시코 몬테레이는 해발 540m 수준의 저지대다. 멕시코 특유의 악명 높은 고지대 변수가 작용하지 않는 평이한 환경이라는 점은 홍명보호에 분명한 호재다. 남아공이 고지대 환경에서 누려오던 독점적 어드밴티지는 몬테레이에서 완벽히 지워진다.

지나해 12월 모로코에서 열린 아프리카네이션스컵 B조 조별리그 남아공-이집트전. 이집트 공격수 모하메드 살라가 남아공 수비수를 따돌리고 공을 몰고가고 있다. /아가디르(모로코)=AP 뉴시스
지나해 12월 모로코에서 열린 아프리카네이션스컵 B조 조별리그 남아공-이집트전. 이집트 공격수 모하메드 살라가 남아공 수비수를 따돌리고 공을 몰고가고 있다. /아가디르(모로코)=AP 뉴시스

◆ 방심은 금물, ‘바파나 바파나’의 뒷공간을 열어라

결국 순수한 전술적 맞대결에서 남아공의 명확한 아킬레스건을 공략하는 것이 핵심이다. 지난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이집트전(0-1 패)이 좋은 힌트다. 당시 남아공은 수적 우위 속에서도 라인을 촘촘히 내린 이집트의 이른바 ‘질식 수비’를 전혀 뚫어내지 못하며 무릎을 꿇었다. 지난달 30일 FIFA랭킹 131위 니카라과의 평가전에서도 22개의 슛을 날렸으나 골망을 흔들지 못했다. 주도권을 잡았을 때 밀집 수비를 파쇄하는 세밀함이 부족하고, 라인을 올린 만큼 배후 공간 노출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결국 홍명보호의 남아공전 해법은 명확하다. 철저하고 냉정하게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남아공이 ‘바파나 바파나’의 기치 아래 라인을 올리고 공을 소유하도록 유도하되, 컴팩트한 수비 블록으로 진입로를 차단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공을 탈취한 순간, 창의적이고 빠른 패스 전환으로 열려 있는 배후 공간을 단번에 무너뜨려야 한다.

본선 무대에서 방심은 곧 재앙이다. 조별리그의 마지막 경기인 만큼, 남아공전은 16강 토너먼트의 대진과 분위기를 결정할 분수령이다. 97년 쿠칭의 아쉬움, 그리고 2010년 그들의 안방에서 얻은 환희의 기억을 모두 뒤로하고, 이제는 오직 승점 3점을 위한 냉철한 전술적 결과물을 증명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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