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포르투갈 축구 DNA 복사한 ‘가짜 언더독’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축구공은 둥글고, 언제나 이변은 일어난다."
월드컵 등 세계적인 규모의 대회가 열릴 때마다 듣는 낭만적인 격언이다. 이번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도 이러한 낭만을 기대해보면 어떨까. 본선 진출국이 48개국으로 늘어나면서 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요르단과 함께 이름도 생소한 서아프리카의 카보베르데, 카리브해의 퀴라소 같은 소국들이 처음으로 지구촌 최대 축제에 명함을 내밀었다.
퀴라소와 카보베르데? 인구 15만 명, 50만 명의 작은 섬나라들이다. 얼핏 보면 강호들의 훌륭한 '승점 자판기'처럼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이들이 만들어낼 지도 모를 이변을 두고 '공은 둥글다'며 요행이나 기적으로 치부하긴 곤란하다. 이들은 공을 둥글게 굴려서, 어쩌다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현대 축구의 국적 규정과 유럽의 선진 유스 시스템을 자국 전력 구축에 아주 영리하게 활용한, 철저히 위장된 '가짜 언더독'들이기 때문이다.

◆ 낭만의 '유기농' 아이슬란드 vs 냉정한 '하이테크' 퀴라소
소국의 기적이라고 하면 대중은 여전히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의 아이슬란드를 떠올린다. 당시 인구 33만 명의 나라에서 '치과의사 감독'과 '목수 출신 선수' 같은 독특한 이력으로 낭만주의적 화제의 중심에 섰다. 비록 이들의 본업이 엄연한 프로 선수였고 다른 직업은 부업이나 과거 이력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나기도 했지만, 본토의 척박한 기후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에 실내 축구 돔을 짓고 국가 주도로 UEFA 고급 지도자를 길러내 만든 내수형 '유기농 축구'의 승리였다.
반면 이번 대회 최고의 동화 속 주인공인 퀴라소는 아이슬란드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인구 15만 명의 작은 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인프라를 깔고 선수를 키우기엔 시간과 재정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퀴라소 축구협회는 행정적 돌파구를 찾았다. 과거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제도의 중심이자 현재도 네덜란드 왕국 내 자치국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활용해, 아약스, PSV 아인트호벤, 페예노르트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네덜란드 유스 시스템이 키워낸 '퀴라소계 이중국적자'들을 대거 흡수했다.
실제로 2014년을 전후로 네덜란드 본토 태생의 선수들 중 퀴라소 혈통의 재능들이 대표팀에 합류하며 전력이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오렌지 군단)의 강력한 스쿼드 벽에 가로막혀 기회가 적었던 에레디비지에 주전급 엘리트 선수들에게 "자신들의 뿌리인 조국을 선택해 함께 월드컵에 도전하자"고 제안한 전략이 적중했다. 2010년대 중반 패트릭 클루이베르트 감독 부임 이후 본격화된 이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이들은 이번 월드컵 북중미 예선에서 무패 조 1위로 본선행을 확정 지으며, 아이슬란드를 제치고 '월드컵 역사상 가장 작은 진출국'이 됐다. 조별리그 E조에 속해 독일, 에콰도르, 코트디부아르 등 강팀들과 힘을 겨룬다.
흥미롭게도 한국 축구 팬들에게 친숙한 거스 히딩크와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공교롭게도 모두 퀴라소 감독직을 거쳐 갔다. 현재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끄는 퀴라소의 26인 명단은 레안드로 바쿠나, 타히트 총 등 전·현직 프리미어리거를 비롯해 스쿼드 대부분이 유럽 1·2부 리그 현역 주전들로 채워져 있다. 아드보카트 특유의 규율 잡힌 수비 블록에 네덜란드식 정돈된 빌드업 체계를 구사한다. '인구 15만 명'이라는 껍질을 까보면 최고급 백화점에 진열된 명품 부품을 영리하게 조립한 '하이테크 축구'가 들어있는 셈이다.

◆ 카보베르데, '인구 역전'이 만든 대서양의 '무서운 도깨비'
아프리카 서해안 대서양의 15개의 섬으로 이뤄진 군도 국가 카보베르데는 15세기 포르투갈에 의해 발견된 이래 500여년간 식민지로 있다가 1975년 독립했다. 카보베르데 역시 유럽의 인프라를 흡수했다는 점에서 퀴라소의 성공 방정식을 공유한다. 이들의 독특한 전력 구축 배경은 카보베르데의 인구 구조와 맞닿아 있다. 카보베르데는 본토 인구(52만 명)보다 과거 가뭄과 경제난을 피해 종주국 포르투갈 등으로 떠난 재외동포(디아스포라, 약 70만 명 추산)가 훨씬 많은 독특한 '인구 역전' 국가다.
과거 맨유의 나니나 스웨덴의 레전드 헨릭 라르손이 카보베르데 핏줄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축구 유전자는 이미 검증 도장을 찍은 상태였다. 포르투갈의 벤피카나 스포르팅CP 등 명문 유스에서 자란 이민 2·3세 아이들에게 카보베르데 대표팀은 매력적인 블루오션이었다. 포르투갈 국대 소집만 하염없이 기다리며 전성기를 날리느니, 카보베르데의 에이스가 되어 월드컵이라는 최고의 쇼케이스에 나서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나니나 홀란두처럼 카보베르데 핏줄의 특급 재능들이 포르투갈 대표팀을 선택했던 흐름은 여전하다. 다만 최근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는 무작정 포르투갈의 부름을 기다리기보다, 실리적인 선택을 내리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에 따라 최근 스페인 라리가 비야레알의 핵심 수비수로 활약 중인 로강 코스타(25)처럼, 전성기에 접어드는 젊은 나이에 과감히 조국 카보베르데의 유니폼을 선택하는 엘리트 자원들이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선수단 전반의 기량 향상은 고스란히 성적으로 이어졌다. 카보베르데는 지구상에서 가장 변수가 많고 신체적 경합이 치열한 아프리카 예선이라는 무대에서 묵직한 실전 압박을 견디며 스스로 뼈대를 다져왔다. 지난 10년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가나, 카메룬 같은 아프리카의 포식자들을 직접 격파해 온 '검증된 도깨비'로, 이번 예선 D조에서도 7승 2무 1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당당히 본선 티켓을 쥐었다.

◆ 세르비아를 깨부순 3-0 완승, '가짜 언더독'들이 던지는 출사표
이들이 결코 만만한 복병이 아님은 본선을 코앞에 두고 터진 모의고사 결과가 증명한다. 한국 시간으로 1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평가전에서 FIFA 랭킹 69위 카보베르데는 유럽의 강호 세르비아(39위)를 3-0으로 대파했다. 리빌딩 중인 세르비아였다고는 하지만, 유럽의 묵직한 체급을 상대로 3골을 퍼부은 경기력은 본선 H조의 스페인, 우루과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등골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48개국 체제라는 월드컵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이 가짜 언더독들이 던질 출사표는 단순한 이변이나 요행이 아니다. 글로벌 네트워크와 제도를 영리하게 활용해 영토와 인구의 한계를 가볍게 지워버린 소국들의 반란.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축구 DNA를 그대로 복사해 온 이들의 발칙한 경기 운영은, 이번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를 관통하는 최고의 관전 포인트이자 흥행 요소가 될 것이다.
-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 이메일: jebo@tf.co.kr
-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