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역전의 부활로 한국마라톤 심장을 다시 뛰게 하자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지난 4월 26일 런던 마라톤에서 케냐의 사바스티안 사웨가 기록한 1시간 59분 30초는 전 세계 마라톤 패러다임의 변화를 선포했다. 오랫동안 인류의 신체적 한계로 여겨졌던 ‘마의 장벽’이 무너진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이제 마라톤은 '벽을 깰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넘어 '어디까지 단축할 수 있을까?'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세계가 100m를 약 17초의 속도로 쉬지 않고 내달리는 동안, 한국 마라톤의 시계는 2000년 이봉주가 세운 2시간 7분 20초에 26년째 멈춰 서 있다. 세계 정상권과는 약 8분, 거리상으로는 3km 이상의 간극이 존재한다. 한때 ‘꿈의 기록’이라 불렸던 2시간 9분대는 이제 국제 경쟁력의 지표가 아니다. 올림픽 자격 기준이 2시간 8분대까지 내려온 지금, 2시간 9분대는 메달을 노리는 성적이 아니라 글로벌 무대에 발을 들이기 위한 ‘최소한의 입장권’에 불과하다. 이 입장권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마라톤의 뼈아픈 현실이다.

◆ 아이러니한 현실: 차가운 트랙과 뜨거운 길거리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한국 마라톤이지만, 지금 트랙과 거리에서 느껴지는 극명한 온도 차는 기묘하기까지 하다. 엘리트 체육은 고갈된 유망주와 정체된 기록으로 암흑기를 겪고 있는 반면, 길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1000만 러너 시대, MZ세대를 주축으로 한 ‘러닝 크루’ 문화는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마라톤 대회 참가권은 ‘광클’ 없이는 구할 수 없는 귀한 몸이 되었다.
불행은 이 거대한 ‘국민적 에너지’가 엘리트 체육의 ‘경기력’으로 전혀 치환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맹 주최 대회는 여전히 폐쇄적인 그들만의 리그로 운영되고, 민간의 러닝 열풍은 취미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이 둘을 잇는 가교가 없는 한, 한국 마라톤의 부활은 요원하다.
◆ 일본의 교훈: 마라톤 강국을 만든 엔진, ‘하코네 에키덴’의 힘
매년 1월 3일, 일본 도쿄 오테마치역 광장은 수많은 인파로 북새통을 이룬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브라스밴드의 경쾌한 연주와 각 대학 응원단의 함성이 새해 아침을 깨운다. 이곳은 일본 마라톤의 심장, 도쿄와 하코네를 이틀간 왕복하는 ‘하코네 에키덴(하코네 역전 마라톤)’의 결승점이다.
일본인들에게 "2일 아침에는 가는 길을 보고, 3일 점심에는 오는 길을 보며 새해를 시작한다"는 말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닌 하나의 거대한 국가적 의식이다. 대학 선수들이 릴레이로 달리는 이 대회의 시청률이 30%를 넘는다. 이 이틀간의 뜨거운 열기가 바로 일본이 세계적인 마라톤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진짜 비결이다.
일본 마라톤이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하는 비결은 '에키덴(역전: 장거리 계주경기)'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에 있다. 이 마라톤으로 향하는 중간 거점인 에키덴이 스피드와 지구력을 동시에 길러주기 때문이다. 엘리트와 아마추어를 묶는 통합 레이스는 선수들에게는 실전 감각과 스포트라이트를, 일반인에게는 엘리트 체육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을 부여한다.
이는 단순히 선수를 기르는 단계를 넘어, 온 국민이 참여하는 축제이자 기업의 투자가 이어지는 매력적인 콘텐츠다. 이러한 일본의 사례는 이 모델이 단순한 이론이 아닌, 유망주 공급의 젖줄로서 국가적 에너지를 엘리트 육성에 결집시킨 '시스템의 승리'임을 증명한다.

◆ 경부역전 마라톤을 국민축제로 부활해 에너지를 한데 모으자
이제 한국 마라톤도 관습을 벗어나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우선 엘리트 선수 풀이 바닥을 드러낼 만큼 고갈됐고, 그나마 남아 있던 국민적 관심마저 차갑게 식어 있다. 이 지점에서 지난 2016년 제62회 대회를 끝으로 중단된 국내 유일의 국토종단 레이스, ‘경부역전마라톤’의 부활을 고대해본다. 부산시청 앞에서 출발해 파주 임진각까지 통일의 염원을 안고 7일간 달렸던 이 전설적인 대회를 국민축제로 다시 깨워보면 어떨까.
단, 과거 연맹 주도의 폐쇄적 모델을 답습하지 말고, 지금의 전 국민적 에너지를 응집할 수 있도록 엘리트·마스터스(비선수 일반 러너)·유소년이 하나의 바통으로 묶이는 ‘통합형 역전 경주’를 제안한다. 시·도 단위의 자존심을 건 대항전을 부활시키되 유소년과 일반인 구간을 반드시 포함해, 우리 동네 크루 형과 우리 학교 유망주, 그리고 실업팀 에이스가 하나의 팀이 되어 바통을 이어받으며 달릴 때 마라톤은 비로소 세대와 지역을 잇는 ‘우리의 축제’가 될 수 있다.
이미 '돈과 사람'은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스포츠용품 브랜드들은 한국의 러닝 크루 문화를 타깃으로 뜨거운 마케팅 각축을 벌이고 있다. 연맹이 ‘경부역전’이라는 매력적인 플랫폼만 제공한다면 기업 스폰서십 유치는 용이할 것이며, 러닝을 일상으로 받아들인 1000만 러너가 주목하는 이 무대는 그 자체로 한국 마라톤의 새로운 자부심이 될 수 있다. 이 '플랫폼 사업자로서의 연맹' 모델은 일반인 중 숨은 인재를 발견하는 '오픈 시스템'으로서, 학령인구 감소로 선수가 고갈된 현 상황에서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다.

◆ 유망주들의 분전: 성공이 아닌 도전에 투자하라
지자체 예산과 전국체전 점수에 매몰된 기존 실업팀의 고질적 병폐를 도려내는 결단도 필요하다. 한국육상의 고질적 문제인 ‘순위 위주’에서 벗어나 ‘기록에 도전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야하며, 기업 역시 메달 색깔이 아닌 기록에 도전하는 ‘서사’에 투자해야 한다.
다행히 암흑기를 뚫고 기록의 시계를 돌리려는 새로운 기대주이 등장하고 있다. 2026년 서울마라톤에서 2시간 11분 05초로 우승하며 자존심을 지킨 박민호(27 국군체육부대)와 그 뒤를 2시간 12분 09초로 바짝 추격하는 김홍록(23 한국전력)의 라이벌 구도는 고무적이다. 또한 중거리에서 쌓은 스피드를 마라톤 후반부에 접목하는 여자부 이현정(25 용인시청)의 도전은 한국 마라톤의 훈련 패러다임을 바꿀 핵심 모델이다. 하지만 이들의 투혼이 결실을 맺으려면 실업팀이 선수들의 ‘실패할 자유’를 보장하고 더 거친 세계 무대로 등을 떠미는 체질 개선이 필수적이다.
◆ 다시 한계에 도전할 야성을 찾아서
우리나라에서 부활시킬 역전 마라톤의 새로운 모델은 연맹의 공신력, 기업의 자본, 그리고 마스터스의 에너지가 결합된 3박자 구조여야 한다. 일본처럼 ‘축제’ 형식을 빌려온다면 대중의 몰입도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 뛰는 형이 실업팀 에이스와 바통을 주고받는 장면’ 은 그 자체로 최고의 마케팅이자, 잠재적 유망주들을 다시 마라톤으로 유입시키는 강력한 유인이 될 것이다.
한국 마라톤의 부활은 단순히 기록 몇 초를 줄이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26년 동안 잃어버렸던 ‘한계에 도전하는 야성’을 되찾는 과정이다. ‘서브 2’ 시대,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영광에 머물 수 없다. '과거의 유산(경부역전)'과 '현재의 트렌드(러닝 크루)'를 결합하여 '미래의 경쟁력(서브 2)'을 도출해내는 것. 그 뜨거운 숨소리가 다시 한반도를 가로지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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