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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의 '오렌지 광풍'...길 잃은 한국, 거품 꺼진 중국 [박순규의 창]
네덜란드, 2026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 4개 '석권'
한국 중국 '금메달 0'...피지컬 앞에 기술 '무력'


네덜란드의 산드라 벨제부르(가운데)가 16일 2026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 결선에서 1위를 기록하며 환호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동메달을 따낸 한국의 김길리. 벨제부르는 이번 대회 2관왕에 오르며 사상 첫 개인전 3관왕을 노리고 있다./밀라노=AP.뉴시스
네덜란드의 산드라 벨제부르(가운데)가 16일 2026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 결선에서 1위를 기록하며 환호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동메달을 따낸 한국의 김길리. 벨제부르는 이번 대회 2관왕에 오르며 사상 첫 개인전 3관왕을 노리고 있다./밀라노=AP.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의 쇼트트랙 경기장은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의 현장이다. 불과 4년, 8년 전만 해도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은 한국의 태극기나 중국의 오성홍기가 차지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 대회, 그 자리는 온통 네덜란드의 '오렌지색'으로 물들고 있다.

전통의 쇼트트랙 강호로 군림했던 한국과 중국이 동반 부진의 늪에 빠진 사이, '스피드스케이팅(롱트랙) 강국'이었던 네덜란드가 쇼트트랙마저 집어삼키며 빙상계의 판도를 완전히 뒤엎었다. 이는 단순한 성적의 변화를 넘어, 쇼트트랙이라는 종목의 패러다임이 '기술과 지구력'에서 '압도적인 피지컬과 파워'로 넘어갔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약진은 경이롭다 못해 공포스럽다. 16일까지 치러진 쇼트트랙 5개 종목 중 무려 4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남자부의 옌스 판트바우트와 여자부의 산드라 벨제부르는 나란히 2관왕에 오르며 사상 첫 '개인전 3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역사에 도전하고 있다.

1992 알베르빌 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쇼트트랙은 2006년 토리노 대회까지 한국의 압도적 독주 시대였으나 이후 판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2010년~2014년 대회에선 중국 여자부의 급성장(왕멍, 저우양)과 러시아(빅토르 안) 변수가 있었으며 2018년~2022년 대회에선 유럽세(네덜란드, 헝가리)의 등장과 상향 평준화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 만큼 네덜란드의 강세가 두드러지진 않았다. 네덜란드의 성공 비결은 '체격의 우위'를 '기술'로 승화시킨 데 있다. 과거 네덜란드는 큰 키와 강한 힘을 바탕으로 롱트랙에서만 강세를 보였으나, 이제 그 피지컬을 쇼트트랙의 코너링과 접목시켰다. 한국 선수들이 기술적으로 파고들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초반부터 강력한 스피드로 레이스를 주도하거나,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버텨내는 힘은 아시아권 선수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닐스 케르스홀트 코치가 언급한 "기술과 체력, 팀 문화의 조화"는 빈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쇼트트랙의 변방이 아닌,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다.

반면, '쇼트트랙 종가' 한국의 성적표는 처참하다. 금메달 없이 은1, 동2. 남자 대표팀은 2002년, 2014년에 이어 역대 세 번째 '개인전 노골드'의 수모를 겪었다. 20년 전 이탈리아에서 열린 토리노 대회에서 진선유 안현수의 '동반 3관왕'을 앞세워 금메달 6개를 수확하던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한국 쇼트트랙의 부진은 '전략의 노출'과 '압도적 에이스의 부재'로 요약된다. 그동안 한국은 체력을 비축하다 막판 스피드로 아웃코스를 추월하는 전략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와 같은 유럽 선수들이 체력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높은 속도를 유지하자, 한국 특유의 막판 스퍼트가 통하지 않고 있다. 뒤에서 치고 나가려 해도, 이미 앞에서 달리는 선수들의 속도가 줄지 않으니 추월 공간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안현수, 진선유, 최민정(전성기)과 같이 위기 상황을 홀로 타개할 '해결사'가 보이지 않는다. 황대헌과 김길리 등이 분전하고 있지만, 세계적인 상향 평준화 속에서 독보적인 기량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 '후미에서 외곽으로 치고 나가는 전략'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중국의 추락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4년 전 베이징에서 9개의 금메달(쇼트트랙 2개 포함)을 쓸어 담으며 기세를 올렸던 중국은 이번 대회 반환점을 돈 시점까지 금메달 '0'개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았다.

현재 중국이 획득한 메달은 전체 은 2, 동 2개뿐이다. 특히 쇼트트랙 종목만 떼어놓고 보면 성적은 더욱 초라하다. 남자 1000m에서 쑨룽이 따낸 은메달 1개가 유일하며, 금메달은커녕 동메달조차 없다. 쇼트트랙 강국이라 자부하던 중국의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진 것이다.

중국의 부진 원인은 '홈 어드밴티지'의 상실과 '귀화 선수 의존도'의 한계다. 판정 논란 속에서도 금메달을 챙겼던 베이징 때와 달리, 이탈리아에서는 냉정한 실력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린샤오쥔(임효준), 류사오앙 등 한국과 헝가리 출신 에이스들을 대거 귀화시키며 전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린샤오쥔은 결정적인 순간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고 기존 선수들은 잦은 페널티로 자멸했다. 남녀 계주 결승 진출 실패는 중국 쇼트트랙의 조직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2026 밀라노 올림픽은 쇼트트랙의 중심축이 아시아(한국·중국)에서 유럽(네덜란드)으로 확실히 이동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분기점이다. 네덜란드는 스피드스케이팅의 힘과 쇼트트랙의 기술을 결합해 '하이브리드 괴물'이 되었고, 한국과 중국은 과거의 영광과 방식에 머물러 있다.

남은 경기는 얼마 없다. 한국은 남녀 계주와 여자 1500m에서, 중국은 남은 개인전에서 반전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강타한 '오렌지 쇼크'를 얼마나 극복할지 알 수 없다. 네덜란드의 강세를 단순한 일회성 돌풍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체격과 파워를 앞세운 유럽세의 도약 앞에, 기술과 순발력을 앞세웠던 아시아 쇼트트랙은 근본적인 체질 개선과 새로운 생존 전략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빙판 위는 지금, 힘이 지배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네덜란드의 산드라 벨제부르(가운데)가 16일 2026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 결선에서 1위를 기록하며 환호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동메달을 따낸 한국의 김길리. 벨제부르는 이번 대회 2관왕에 오르며 사상 첫 개인전 3관왕을 노리고 있다./밀라노=AP.뉴시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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