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울진=김성권 기자] 경북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해안도로. 차 문을 여는 순간, 짠 바다 냄새와 함께 거센 동해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파도는 낮에도 쉼 없이 방파제를 두드리고, 도로 바로 옆 해안 절벽 위에 나무 한 그루가 바다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158호 '울진 후정리 향나무'다.
가까이 다가가자 먼저 향이 코끝에 닿는다. 바닷바람 속에서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짙고 묵직한 향이다. '향나무는 향으로 존재를 알린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현장에서 바로 실감하게 된다.
향나무가 서 있는 곳은 결코 편한 터가 아니다. 바로 아래는 동해, 사방은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휘감는다. 뿌리는 바위와 모래가 섞인 척박한 땅을 붙잡고 있다. 그럼에도 나무는 바다 쪽으로 몸을 틀어서 가지를 뻗고 있었다. 마치 수백 년 동안 이 방향으로 불어온 바람에 스스로 몸을 맞춰온 듯한 모습이다.
줄기는 지면 가까이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한쪽은 곧게, 한쪽은 비스듬히 바다를 향한다. 500년 세월 동안의 풍랑이 만든 수형이라는 설명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 향나무 앞에 서면 누구나 전설을 먼저 듣게 된다. '울릉도에서 떠밀려 왔다'는 이야기다.

현장에서 만난 한 주민은 "어릴 적부터 어른들한테 늘 그렇게 들었다"며 "태풍이 몰아친 어느 날, 울릉도 향나무가 파도에 실려 와 여기서 뿌리를 내렸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무 옆 성황사를 가리키며 "마을에 큰일이 있으면 이 나무부터 찾았다"고 덧붙였다.
이야기가 허황되게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주변 풍경 때문이다. 울진 일대에서는 향나무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반면, 울릉도에는 과거 향나무가 지천으로 자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해안 사람들 사이에서는 "안개 속에서 길을 잃어도 향기로운 바람을 따라가면 울릉도에 닿을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울릉도 향나무 역시 수난의 시대를 피하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벌채됐고, 해방 이후와 6·25 전쟁을 거치며 한때는 소금을 굽는 장작으로 쓰일 만큼 흔했던 시절도 있었다.
향나무 아래에는 이 나무에서 떨어진 종자로 자라난 어린 향나무들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나무에 손을 대보니 거친 껍질 사이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바닷소리와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 향나무는 수백 년 동안 같은 풍경을 봐왔을 것이다.

울진 후정리 향나무는 500년 이상의 수령으로 높이 11m, 가슴높이 둘레 1.25m이다. 줄기가 지상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1번 목은 땅의 표면 위로 올라와 눈에 보이는 지제부(地際部)에서 2개의 가지로 갈라진 뒤 지상 7m 높이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2번 목은 지상 5m 및 7m 높이에서 7개의 가지로 갈라져 있다.
보호 울타리 너머로 바라본 나무는 '관리 대상'이라기보다 여전히 마을 한가운데 살아 있는 존재에 가깝다. 주민들은 지금도 이 나무를 '신목'이라 부른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천천히 가라앉자, 파도 소리도 낮아지는 듯했다. 향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은 채, 다만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만 남긴 채였다.
울릉도에서 왔다는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나무는 분명 시간을 건너온 존재였다. 바람이 바뀌고, 바다가 모양을 바꿔도 향나무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으로 동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500년 동안 이 나무는 이동하지 않았다. 대신 파도와 계절, 사람들의 기억이 나무 곁을 지나갔다. 남아 있다는 것, 버텨왔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에서는 충분한 이야기가 됐다.
바다는 또다시 파도를 밀어 올리고, 바람은 향을 실어 보냈다. 그리고 후정리 해안에 선 향나무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다음 500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tk@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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