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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비사㊵] 北 '인권 사각지대'에 러시아 진심은 없었다
러시아 내 北 벌목장에 인권 유린 의혹
언론 취재 허용하며 北에 경고 메시지
러, 자체 조사 나섰지만 인권은 쏙 빼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92년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역 내 북한 벌목장에서 발생한 인권 유린 실태가 밝혀진 과정을 재구성했다. 우리 정부도 이를 파악한 뒤 즉각 대응에 나섰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92년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역 내 북한 벌목장에서 발생한 인권 유린 실태가 밝혀진 과정을 재구성했다. 우리 정부도 이를 파악한 뒤 즉각 대응에 나섰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 | 김정수 기자] 1992년 3월 20일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역 내 작은 도시 체그도민. 독일 슈피겔 소속 기자는 러시아 환경 전문가들과 함께 '북한 벌목장'을 찾아 나섰다. 최근 이곳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문제의 벌목장 입구에 다다를 무렵 '더 이상 접근해서는 안 되겠다'는 께름칙한 기운이 일행을 휘감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여기저기서 북한 관리자들이 튀어나와 이들을 급습했다. 불편한 소문의 진실이 어느 정도 확인된 순간이었다.

벌목장은 1967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북한 당국 사이 맺어진 비밀 협약에 따라 설치됐다. 벌목장은 오롯이 북한이 관리했으며 외부인의 접근이 엄격히 제한됐다. 땅과 숲을 빌려준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초 수익 배분은 50%씩 책정됐지만, 이후 러시아는 70%의 수익을 요구했다. 북한은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 북한은 이곳을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문제 제기가 있기 전, 북한에 자제를 당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수용자들의 신원도 러시아에 일절 제공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상당수 수용자가 정치범일 것이라고 우려하며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외무부(외교부) 장관에게 보고된 내용. 영국 ITN 방송에서 1992년 5월 27일 보도한 내용으로, 정부는 해당 보도 이후 모든 재외공관에
당시 외무부(외교부) 장관에게 보고된 내용. 영국 ITN 방송에서 1992년 5월 27일 보도한 내용으로, 정부는 해당 보도 이후 모든 재외공관에 "북한 인권 유린 사례의 하나로서 활용하라"고 당부했다. /외교부

그러던 중 러시아는 북한 강제 수용소에 관심 있는 영국 ITN 소속 기자가 시베리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러시아는 즉각 KGB(소련 정보기관)를 동원해 기자에게 접근했고, 북한 벌목장 취재를 적극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개선의 기미가 없는 북한에 따끔한 한 방을 날려주고 싶었던 셈이다.

영국 기자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고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 보좌관과 KGB, 경찰이 동행에 나섰다. 최초 현장에 도착했을 때 북한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이중 몇몇은 북한 관리자들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정리되면서 영국 기자는 카메라를 쉼 없이 돌리기 시작했다.

취재를 통해 파악된 현실은 예상을 뛰어넘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벌목장에서 상주하는 북한 비밀경찰은 수용자들을 고문, 구타할 뿐 아니라 심지어 처형까지 집행하고 있었다. 당장 어림잡아도 처형자만 45명이었다. 고문실로 이용되는 창문 없는 방이 발견되기도 했다.

급식 수준이나 주거 여건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북한의 무차별적인 벌목으로 70억 달러 상당의 지역 사막화까지 확인됐다. 옐친 대통령 보좌관은 충격을 받은 듯 수용소 폐지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방송은 1992년 5월 27일 전파를 탔다.

우리 정부는 해당 보도를 접한 뒤 모든 재외공관에 "영국 방송사가 체그도민에 위치한 북한의 강제 수용소 현장을 특종 보도했다"며 "보도 내용과 취재 배경을 별도 첨부 할테니 북한 인권 유린 사례의 하나로서 활용하라"고 당부했다. 북한의 인권 실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등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조치였다.

정부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소극적 대응을 경제적, 정치적 상황으로 나눠 평가했다. /외교부
정부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소극적 대응을 경제적, 정치적 상황으로 나눠 평가했다. /외교부

정부는 러시아와 접촉해 북한 인권 문제를 더 띄워보려 했지만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우선 러시아가 문제 해결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취재 허용은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주는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던 것이다. 벌목장 설립이 양국 간 협약에 근거를 두고 있고, 북한에 체류 중인 러시아인 보호 문제도 고려 사항이었다.

러시아는 우리 정부에 "인권 문제는 보편적 사안이지만 남·북, 한·러, 북·러 관계에 따라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며 더 이상 개입하지 말라는 취지로 선을 그었다. 다만 수용소를 탈출한 북한 노동자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주재 유엔난민기구(UNHCR)와 소통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는 사이 하바롭스크 지방 최고회의는 문제의 벌목장을 조사한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조사는 북한 벌목장 9곳과 8173명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1989~1991년에만 범죄 31건과 위법 사례 1443건이 파악됐다. 대부분이 교통위반 행위였지만 가양주 제조와 금렵법 위반도 있었다.

작업 과정에서 사용된 일부 석유 제품은 환경 오염을 일으켰으며 과실로 인한 산불도 9회나 있었다. 또 북한 측 밀렵에 따라 주변 지역 동식물계가 '소멸' 수준이라는 분석까지 나왔다. 이에 따라 하바롭스크 지방 최고회의는 "향후 작업은 협약의 완전한 준수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며 "협약 위반 사항을 양국 정부에 통보하고 북한 채벌자들에 대한 러시아 법률 위반이 없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이번 조사에서 북한 노동자 인권 문제는 아예 다뤄지지 않았다. '협약 준수 통제 실무위원회' 구성이 언급되긴 했지만 상황 악화를 방지하는 수준에 그쳤다. 정부는 이에 대해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벌목장 유지가 필요하고, 인권 문제를 꺼내 든다면 북한이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평가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진심'은 없었던 셈이다.

js881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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