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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석] "Don’t Look Up" 민주당이 외면한 '강선우 사태'
<돈 룩 업>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메릴 스트립 캐릭터의 얼굴로 본
강선우 사태와 민주당의 오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절대 권력자 미란다 프리슬리, <돈 룩 업>에서 현실을 외면한 미국 대통령 등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캐릭터들이 강선우 사태를 마주한 한국 정치 현실과 겹쳐진다. 사진은 메릴 스트립이 2024년 9월 1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피콕극장에서 열린 제76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 참석한 모습.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절대 권력자 미란다 프리슬리, <돈 룩 업>에서 현실을 외면한 미국 대통령 등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캐릭터들이 강선우 사태를 마주한 한국 정치 현실과 겹쳐진다. 사진은 메릴 스트립이 2024년 9월 1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피콕극장에서 열린 제76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 참석한 모습.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메릴 스트립만큼 다양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배우가 있을까. 아카데미상 21회 노미네이트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그의 연기력을 증명한다. 메릴 스트립의 수많은 캐릭터 중에서도 유독 인상 깊은 인물이 둘 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패션계 절대 권력자 미란다 프리슬리, 그리고 <돈 룩 업>에서 현실을 외면하는 무능한 대통령 제이니 올린이다. 이 두 인물은 권력이 얼마나 쉽게 오만과 무능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근 강선우 의원의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직 사퇴 과정을 지켜보며 이 두 얼굴이 겹쳐 보였다. 보좌진 갑질 논란이 불거진 지 2주가 지나도록 말을 아끼던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당대표 후보자가 공개적으로 사퇴를 요구한 지 불과 17분 만에 전격 사퇴를 결정한 장면은, 정치가 얼마나 손쉽게 원칙과 상식을 외면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패션잡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는 절대 권력이 만들어낸 갑질의 화신이다. 그는 조수 앤디에게 해리포터의 미출간 원고를 구해오라는 불가능한 요구부터 태풍이 몰아치는 날 항공편을 마련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까지 내린다. 앤디가 난처한 표정을 짓거나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마다 "That’s all(그게 다야)"이라는 차가운 한마디로 대화를 끝내버린다.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줄 섰다'는 절대적 우위에서 나오는 잔인함. 그 자리를 갈망하는 수백 명이 대기하는 구조 속에서 갑질은 정당화된다.

강 의원을 둘러싼 보도는 놀랍도록 미란다를 닮아 있다. 5년간 보좌진 28명 교체, 자택 쓰레기 처리 지시, 비데 수리 요청.
강 의원을 둘러싼 보도는 놀랍도록 미란다를 닮아 있다. 5년간 보좌진 28명 교체, 자택 쓰레기 처리 지시, 비데 수리 요청. "집사처럼 부렸다"는 전직 보좌진의 증언은 이같은 사적 업무 지시가 일상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할지도 모른다. /배정한 기자

강 의원을 둘러싼 보도는 놀랍도록 미란다를 닮아 있다. 5년간 보좌진 28명 교체, 자택 쓰레기 처리 지시, 비데 수리 요청. "집사처럼 부렸다"는 전직 보좌진의 증언은 이같은 사적 업무 지시가 일상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태움 방지법'을 발의했던 강 의원이 정작 자신의 보좌진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씁쓸함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민주당의 대응이었다. '돈 룩 업'의 올린 대통령은 혜성이 지구로 돌진하는데도 "Don't look up!(위를 보지 마)"이라며 위기를 외면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거와 지지율, 정치적 이해관계. 민주당의 반응이 꼭 그랬다. 구체적 증언이 쏟아졌음에도 "청문회에서 충분히 소명했다", "보좌진, 의원의 관계에서 갑질은 약간 성격이 다르다"는 식의 반응만 있었다. 현실의 혜성을 못 본 척하는 영화 속 인물들과 다름없다.

이러한 태도 이면에는 복잡한 정치적 셈법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지명한 인사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부담감, 장관 후보자를 지켜야 한다는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 그리고 당 지도부의 명확한 입장 부재가 맞물렸다. 그 결과 민주당은 국민의 상식적 판단보다는 내부의 정치적 역학에 매몰되고 말았다.

결국 박찬대 후보가 공개적으로 결단을 촉구하자 강 의원은 17분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박 후보와 대통령실의 사전 교감이 있었든 없었든, 강 의원이 이미 결심하고 있었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이는 역설적으로 처음부터 가능했던 일이 단지 정치적 결단의 부재로 2주 이상 지연됐음을 보여준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이미 존재했지만, 그것을 사용할 용기와 시스템이 없었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해이, 정당의 일시적 판단 착오로 치부하긴 어렵다. 권력을 가진 자의 일탈을 견제하지 못하는 구조.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의사결정 체계, 그리고 원칙보단 진영 논리가 우선시되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봐야 한다. 지난 10일 열린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당권 주자인 박찬대 의원과 김병기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인사하고 있다. /남윤호 기자
이번 사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해이, 정당의 일시적 판단 착오로 치부하긴 어렵다. 권력을 가진 자의 일탈을 견제하지 못하는 구조.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의사결정 체계, 그리고 원칙보단 진영 논리가 우선시되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봐야 한다. 지난 10일 열린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당권 주자인 박찬대 의원과 김병기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인사하고 있다. /남윤호 기자

이번 사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해이, 정당의 일시적 판단 착오로 치부하긴 어렵다. 권력을 가진 자의 일탈을 견제하지 못하는 구조.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의사결정 체계, 그리고 원칙보단 진영 논리가 우선시되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봐야 한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현실에서 그런 인물을 만나는 건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스크린에서 보여준 권력의 오만과 무능은 허구였으나 우리가 목격한 현실은 그보다 더 씁쓸하다.

영화는 2시간여의 러닝타임에 끝난다. 그러나 우리에겐 엔딩 크레딧이 없다. 장관 후보자 강선우는 책임을 지고 사퇴했어도 그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무겁다. 진정한 변화는 개인의 사퇴가 아닌 구조의 개혁에서 시작된다.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를 강화하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원칙을 세우며,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sejungki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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