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패 속에 있는 작은 빛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작품이 만들어진다"
[더팩트|권혁기 기자] 유호진(23)은 만 19세에 아시아인 최초로 F.I.S.M(세계 마술 올림픽) 그랑프리를 수상한 역대 최연소 마술사다. 일반 대중은 잘 감이 오지 않을 수 있어 예를 들자면, 한국인이 미국 NBA에 진출해 올스타전에 출전, MVP를 차지한 것과 같은 의미다.
그는 그저 단발성으로 뭔가 신기한 마술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스토리를 만들어 공연한다. 유호진이 펼치는 마술이라는 길을 따라가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실제로 유호진은 마술을 관람한 후 눈물을 흘린 영국 할머니를 보고 더욱 의욕을 불태웠다.
지난달 25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 <더팩트> 본사에서 만난 유호진에게 마술 테크닉에 대해 질문하자 "고난이도 테크닉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수가 노래를 잘 불러야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마술은 기술의 대단함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답했다. 우문현답이었다.
-맞는 말이다. 공연을 보면서(유튜브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0r0rZKvSFoA) 드라마틱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마술이라는 게 스토리를 정해 펼치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저는 예술성을 추구하는 편이다. 마술을 보면서 뭔가 슬픈 감정을, 보이지는 않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다. 유호진이라는 사람이 하나의 마술이 되길 바란다. 아트라면 아트, 작품이라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느끼는 건 관객의 몫인 것 같다. 제 공연 마지막에 스카프가 등장을 하는데 바람에 흩날리는 느낌, 저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처음 마술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초등학교 때 마술사를 꿈꿨고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공연을 했다. 계기는 간단했다. 방과후 집에 가는 길에 아는 형이 카드가 나타나는 마술을 보여줬는데 '이 사람은 뭔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내성적이었다. 그래서 마술이 친한 친구가 돼 준 셈이다. 마술이라는 친구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었다. 누군가 내 가족을 사랑해주면 기쁜 것처럼 친구들이 내 친구(마술)를 좋아해주는 게 기뻤다. 다른 친구들은 내 친구(마술)를 보고 나와 친구가 됐다. 그래서 마술과 더 끈끈한 친구가 됐다. 어느 순간 마술에 푹 빠져 마술밖에 모르는 바보가 됐다. 어머니가 저를 이상하게 보셨을 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마술사를 꿈꾸게 됐고 세계 마술 올림픽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갔다.

-특별한 교습을 받았나?
마술 학원을 다녀야 했다. 마술 학원이 정말 많다. 지하철이 많은 것처럼 많은데, 어떤 지하철을 타고 가야할지 몰랐다. 부모님의 반대도 심하셨다. 마술 도구를 사면 보는 족족 부모님이 버리고는 하셨다. 부모님은 저에게 마술이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도 몇 년 동안 계속 하니까 마음을 열어주셨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허락해 주셨다. 대회도 많았다. 롯데월드에서 매년 전통적으로 열리는 마술 대회에 처음 참가했다. 상은 타지 못했지만 무대 자체가 행복했다. 관객을 위해 마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회 출전하기 시작해 9번째에 처음 상을 탔다. 8전9기의 원동력은 '상을 타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어리기도 했고, '어리니까 괜찮아'라는 말도 큰 용기가 됐다.
-공연 중에 카드 마술도 인상적이었다.
어릴 때 비둘기, 지팡이, 장갑, 손수건 마술에서 얻은 작은 장점들이 제 카드 마술을 만들게 해준 것 같다. 사실 집안이 가난해 카드를 많이 샀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에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마술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상금이 있는데, 2등 상금 70만원을 받아 어머니께 뭔가를 해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직업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저도 후배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는데,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실패 속에 있는 작은 빛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그게 지금 제 작품이고,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 같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하루 5000여명의 관객을 받는다. 열흘이면 5만명이다. 7명의 마술사들이 15분씩 공연을 한다. 정말 행복하다.
-마술사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그리 밝지는 않다. 몇 년 전까지는 '직업이 뭐야'라고 했을 때 마술사라고 말하는 게 부끄러운 적도 있었다. 마술사는 배고픈 직업이고 힘든 직업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도 한 켠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마술사는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무대에서 제 마술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를 뵌 적이 있었다. 그 때 '마술로 감동을 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림을 현실로 가져온 기분이었다. '환상'을 현실로 가져온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걸 부끄러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마술을 보는 사람들의 인식은 바꿔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마술사라고 하면, 세계 마술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타도 '한 번 보여줘봐'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보여줄 수도 있다.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걸 가벼운 볼거리로 치부하는 분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마술을 사랑하는지, '마술사 유호진'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마술은 마술로 표현할 뿐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가짐 덕분에 세계 마술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것 같다.
2012년에 그랑프리를 타고 회사를 차렸다. 사업도 하고 무대에도 올랐다. 2013년 7월 21일 처음으로 마술 콘서트를 열었다. 하루 2~3시간씩만 자면서, 해외도 왔다갔다 하면서 공연을 했다. 그렇게 지내다 귀가 중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가 났었다. 대퇴골이 부서져 무대 공연이 캔슬이 되고, 해외 공연에 참가하지 못하니 위약금이 생겨 빚이 억대로 늘어났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빚이 늘어나 마술을 포기까지 했었다.
-재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지금 소속사인 '일루셔니스트'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의사 선생님도 만류를 했다. 재활치료를 받아야하기 때문에 무대에 설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 재활이 빨라 7분은 서 있을 수 있었다. 1년 동안 일루셔니스트 소속으로 활동을 했는데 브로드웨이에서 따로 공연을 하는 게 있었다. 딱 7명만이 그 무대에 설 수 있는데, 제가 활동한 투어 멤버(말하자면 2군)에서 2명이 브로드웨이로 간다고 했다. 정말 가고 싶었다.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공연 이후 제 기사가 나왔다. 마지막 한 줄이었다. 다른 마술사들 얘기 이후에 '쇼는 유호진이 훔쳤다'는 한 줄이었다. 그렇게 브로드웨이로 가게 됐다. 오리지널 멤버가 된 아시아 마술사는 내가 처음이었다. 브로드웨이 공연도 반응이 좋아 장기계약을 하게 됐다. 한국에서 빚을 지고 했던 부분은 '제 삶에 있어 비싼 수업료'였던 것 같다.
-부모님도 좋아하시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마트에서 캐셔 업무를 보셨다. 지금은 그만 두시게 하고 제가 생활비를 드리고 있다.
-마술사로서 롤모델이 있었나?
예상하시겠지만 이은결 마술사는 제 롤모델이었고 최현우 마술사는 제 연예인이었다. 정말 노래부르고 연기하는 연예인은 몰라도 이은결과 최현우는 알았다. 정말 사랑하고 존경했다. 지금도 같이 밥을 먹고 하는 게 신기하다. 이은결의 사인을 받고 싶은데 공연에 갈 돈이 없어, 인터넷에서 이은결 사인을 찾아 프린트해 벽에 붙여 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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