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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연의 무비무브] '빠름의 시대', 느리게 살아보기

여유있는 삶의 미학을 이야기한 일본영화 '안경'. 영화 '안경'은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에 상실해가는 여유로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영화 '안경' 스틸
여유있는 삶의 미학을 이야기한 일본영화 '안경'. 영화 '안경'은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에 상실해가는 여유로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영화 '안경' 스틸

새로운 1년, '느림의 미학'이 절실해

[더팩트ㅣ성지연 기자] "모든 사물과 움직이는 것들을 향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최근 픽사 스튜디오 김재형 애니메이터와 인터뷰를 하던 중, 귀를 쫑긋하게 한 말이다. '좋은 애니메이터'의 덕목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는데 곱씹어 보니 비단 특정 직업군에만 해당되는 덕목은 아닌 듯하다. 나 아닌 타인이나 다른 것들을 애정 있게 바라보는 시선과 관심은 스스로의 삶을 가꾸는 좋은 자양분이니까.

2016년, 새해를 맞이해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다이어리를 구입했다. 다이어리 첫 장을 넘기기가 바쁘게 스케줄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빼곡한 취재일정을 보니 올 한해도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속보 싸움에 끌려다닐 스스로가 그려진다. 벌써 두통이 밀려온다. 말이야 좋지, 이러다간 '다른 사물과 사람에 관심을 두는 삶'은 불가능할 듯싶어 스케줄을 적다 말고 올해의 목표를 큼직하게 적어봤다.

'느리게 살자'

지난 2007년 개봉한 일본 영화 '안경'.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안경' 속 바다마을 사람들을 통해 슬로우 라이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안경' 포스터
지난 2007년 개봉한 일본 영화 '안경'.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안경' 속 바다마을 사람들을 통해 슬로우 라이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안경' 포스터

그러고 나니 잔업이 싫어 노트북을 야멸차게 덮었다. 쓰다 만 기사가 마음에 걸려 가슴 한편이 지릿지릿했지만, 일이 없으니 두통과 어깨결림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습관처럼 일본영화 '안경'을 틀었다. 올해 목표 '느리게 살기'와는 다른 '회피하기'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어쨌든 여유로운 마음을 위한 첫 실천이다.

영화 '안경'은 지난 2007년 겨울 개봉했는데 굉장히 싱거운 느낌이다. 가끔 자극적인 느낌의 영화들을 보고 나면 '디톡스' 차원에서 틀어보곤 하는데 밋밋하긴해도 건강한 영화다. 메가폰을 잡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작품은 대부분 '안경'과 같은 느낌인데 거기서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영화의 배경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다. 일상에 지친 여자 다에코(고바야시 사토미 분)가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이곳으로 여행을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벌어진다' 표현과 달리 영화 속 다에코의 여행기는 단조롭다. 아침에 일어나 민박집 주인이 차려주는 맛있고 정갈한 밥을 천천히 음미한 뒤 바닷가에 나가 조용히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는 게 고작이다. 특별한 게 있다면 마을 사람들이 하는 기이한 체조 정도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여행 온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안경'. 영화 속 주인공 다에코는 바쁜 현대인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영화 '안경'스틸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여행 온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안경'. 영화 속 주인공 다에코는 바쁜 현대인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영화 '안경'스틸

'안경'은 이런 삶을 특이하다고 여기는 현대인 타에코를 통해 요즘 사람들이 잊고 살았던 여유를 이야기한다. 느림에서 비롯된 특별할 것 없는 행동이지만, 현대인 타에코가 별나다고 치부하는 장면은 볼 때는 왠지 슬프다.

속보 싸움을 하는 것이 직업인 기자가 '느리게 사는 것'을 한해 목표로 잡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또 있을까. 밥 한 끼를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사치인 바쁜 일상에서 '안경'속 바다마을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꿈꾸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닷가 마을 사람 만큼의 여유는 아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영화 한 편으로 일상을 마무리하자는 결심에서 나온 목표다. 연예부 기자 나름의 '느림'의 방법을 찾은 셈이다.

비단 기자뿐일까, 요즘엔 직업군을 막론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고 대처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주위 사람들이 많다. 국내 극장가만 봐도 그렇다. 지난해 한국 영화는 발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을 좇았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스타일리시한 천만 영화가 두 편이나 탄생했다. 하지만 '천만'이란 관객 수는 '천만이 아닌 영화'를 흥행에 실패한 영화로, 귀하지 않은 작품으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관객들은 다양한 장르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으며 획일화된 취향을 강요받았다.

양극화가 심한 극장가에 아쉬움을 표현한 배우 정우성. 최근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를 통해 인터뷰한 배우 정우성은 로맨스 영화에 출연, 제작까지 도맡은 이유에 대해 다양성이 결핍된 국내 극장가의 현실이 상당부분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남윤호 기자
양극화가 심한 극장가에 아쉬움을 표현한 배우 정우성. 최근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를 통해 인터뷰한 배우 정우성은 로맨스 영화에 출연, 제작까지 도맡은 이유에 대해 다양성이 결핍된 국내 극장가의 현실이 상당부분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남윤호 기자

최근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를 통해 만난 배우 정우성도 인터뷰 도중 양극화 된 국내 극장가에 아쉬운 마음이라며 현 시대를 '상실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정우성은 "사랑이 절실한 시대가 지금인거 같다. 영화계 뿐 아니라 요즘 모든 것이 너무 빠른 것에만 익숙해져 인간 본성이 원하는 원초적인 욕구 마저 결핍되는 듯 하다"며 아쉬워했다.

정우성의 말처럼 모든 것이 풍요롭고 가능한 오늘이지만, 중요한 것마저 버리고 가는 '상실의 시대'다. 사랑할 시간이 없어서 연애를 포기하고 유행을 좇느라 개성을 포기한다. 여유가 없어 휴식도 없다. 결국 '삼포세대'같은 신조어만 다양하게 생겨났다. 게으름과 여유를 구별하지 못하니 결국 남는 건 시대에 끌려가는 삶이다.

올해는 필자도, 필자의 일터인 극장가도 한 템포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유지하길 소망한다. 주변에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도 주의깊게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란다. 천만 관객을 위한 영화 대신 천만 개의 색깔을 가진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를 말이다.

빠름의 시대에서 여유있는 삶을 고집하는 건 분명 남들보다 뒤쳐지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유있게 살고자 하는 작은 노력들은 더 큰 그림을 꿈꾸게 한다. 조금 느리게 걷는 대신 좀 더 세밀하고 견고한, 튼튼한 알맹이를 얻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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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가 심한 극장가에 아쉬움을 표현한 배우 정우성. 최근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를 통해 인터뷰한 배우 정우성은 로맨스 영화에 출연, 제작까지 도맡은 이유에 대해 다양성이 결핍된 국내 극장가의 현실이 상당부분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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