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일 기자] 그리스 축구에 2004년은 큰 의미가 있는 해였다. 강력한 수비와 효율적인 역습으로 '경제적인 축구'를 구사하며 사상 첫 '앙리 들로네(유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당시 그리스의 수비 축구는 현대 축구의 새로운 동향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유로존 가입 3년째로 아테네 올림픽까지 열려 경제적 호황도 누렸다. 하지만 8년 후인 유로 2012에선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Again 2004'의 꿈은 물거품이 됐고, 경제 상황도 어려워졌다. 하지만 8년 전 못지않게 '할 수 있다'는 희열을 느끼게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스는 23일 오전(한국시각) 폴란드의 그단스크 아레나에서 열린 유로 2012 8강 '전차군단' 독일과 경기에서 2-4로 완패해 짐을 쌌다. 두 팀의 경기는 '구제금융 매치'로 불릴 만큼 축구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리스가 최근 경제위기로 구제금융을 받는 상황에서 그 대가로 혹독한 긴축 재정을 요구받았는데, 그 중심에 독일이 있다는 게 그리스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였다. 일부에선 채무국과 채권국의 대결로 불렀다. 그리스인들은 축구에서만큼 꼭 이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선수들도 독일전에서 자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하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독일은 다양한 공격 무기를 앞세워 '4골 화력 쇼'를 선보이며 그리스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다운 면모를 보인 것이다. 0-1로 뒤진 후반 10분 사마라스가 동점 골을 넣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스가 대이변을 연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지만, 독일은 역시 강했다. 그리스 선수들과 팬들도 완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수들과 팬들은 경기 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경기 막판까지 만회 골을 넣으며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우승후보와 맞대결에 후회는 없었다. 단, 상대는 가장 이기고 싶었던 독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리스는 이미 조별 리그에서 예상 밖의 선전을 보여 '작은 기적'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스는 유로 2004 이후 세대교체에 실패하며 유로 2008과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연달아 실패를 맛봤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번 대회에서도 노장들이 즐비한 그리스가 현대 축구의 패러다임인 창의력과 기동력에서 크게 뒤져 조별 리그 탈락을 점쳤다. 하지만 개최국 폴란드와 1차전에서 1-1로 비기더니 2차전 체코에 0-2로 졌지만, 3차전에서 '다크호스' 러시아를 1-0으로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8강행에 성공했다. 초라한 시작이 놀라운 결과물로 이어지자 팬들은 기뻐했다.
일부 언론들은 그리스의 1, 2차전 경기 결과를 두고 "경제위기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비꼬아 표현했다. 하지만 3차전에서 보란 듯이 이변을 일으키자 '로이터통신' 등 주요 언론들은 "그리스가 재정위기의 조국에 승리를 선사했다", "그리스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 "아테네 시대는 감동과 환호로 휩싸였다"며 모처럼 그리스인들을 웃게 한 대표팀의 노고를 조명했다.
국내 팬들에겐 그리스가 8강에서 져 실패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미 조별 리그를 통과한 것 자체에 '희망'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나라 사정이 심각한 만큼 8년 전 우승 못지않은 감격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 국민은 유로 2004에 이어 또 한 번 소중한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스포츠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마음을 비우고 경기 그 자체에 온 힘을 기울이는 데 있다는 진리를 8강전을 통해 다시금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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