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보안사서 녹화사업 강요 뒤 총상 입고 사망
[더팩트|김동선 기자] 대학 재학 중 징집돼 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로부터 프락치 강요 공작(녹화사업)을 받다가 사망한 채로 발견된 한희철(서울대학교 1979년 입학)·김두황(고려대학교 1980년 입학) 추모사업회는 10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 두 사람의 사인 규명을 촉구했다.
추모사업회는 이날 서울 진화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화위가 불법적인 녹화사업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와 유가족들의 피해에 대해서 국가(국방부·방첩사령부)가 배·보상과 명예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처를 할 것을 권고했지만 이는 실체적 진실 규명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진화위는 지난 4일 한희철·김두황 군 사망에 대해 △국가의 위법한 공권력 행사 △신체·양심의 자유 등 중대한 인권 침해 △이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 점 등에 대해 국가가 피해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추모사업회는 "이들의 직접적인 사인을 규명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라며 "진화위는 이들 사망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희철 군은 1979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가 1982년 12월 입대 후 1983년 12월 6일 보안사에 연행돼 5일 동안 집중적으로 녹화사업 및 학생운동 관련 취조·고문을 받은 후 10일 풀려났다. 그는 하루 뒤인 11일 새벽 경계근무를 서던 중 가슴에 총탄 3발의 맞고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김두황 군은 1980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다가 1983년 3월 친구 양창욱과 함께 성북경찰서로 끌려가 11일 동안 고문에 시달리다가 군에 강제 징집됐다. 그도 보안사에서 고문과 녹화사업을 강요받다가 입대한 지 3개월 만인 6월 18일(법정기일) 역시 경계근무를 서다가 머리와 가슴 등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됐다.
녹화사업이란 전두환 정권이 군부독재를 비판하는 대학생들을 군에 강제징집하고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며 정보를 수집시킨 일이다.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녹화공작 관리번호가 확인된 보안사 공작 피해 인원은 2400여 명에 이른다.
다음은 김두황추모사업회 양창욱 회장이 밝힌 '김두황 강제징집 뒤 프락치 강요 공작 진실 규명 결정문에 대한 입장'이다.
23살 김두황은 41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1980년 광주 5·18 전두환의 폭압에 맞서 싸워온 우리들은 1983년 3월 7일 성북서 경찰의 11일간의 온갖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며 신체검사도 없이 학교 정문에서 103보충대로 강제 징집되었다.
전두환의 노골적이고 잔인한 학생운동 탄압은 김두황을 비롯한 3000명이 강제징집 피해를 입었고 18명이 강집, 녹화공작 과정에서 진실 규명을 받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오늘 41년 만에 처음 김두황의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 진실 규명 인정 결정문을 받았다.
환영한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친구들의 명단을 주지 않기 위해 끝까지 항거하다가 간 김두황 원혼이 아직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 박준병 보안사(방첩사) 반란수괴 3인방과 최경조, 서의남, 고영준, 조창현 보안사(방첩사) 녹화공작 4인방, 김두황을 22사단으로 끌고 가 죽음으로 내몬 심사장교 여인국과 대대장 조금주에 대한 그 어떤 처벌도 없이 진화위는 면죄부를 주었다.
진실 규명은 이제 시작이다. 한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온갖 추악한 윤석열 같은 반역의 무리들이 철퇴를 맞고 국민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할 것이다.
41년이 지난 오늘 두황의 영면에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아직 안식을 하지 못하고 구천에서 떠돌고 있을 두황에게 조금 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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