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산모, 살인 미필적 고의도 없어"
여성단체 "판결 환영, 입법 공백 해결해야"

[더팩트 | 정예은 기자] 36주 차 태아를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한 뒤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산모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심은 징역형의 집행유예였다.
서울고법 형사5부(김용석 부장판사)는 23일 오후 살인 혐의로 기소된 산모 권 모 씨와 병원장 윤 모 씨, 집도의 심 모 씨 등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을 열고 권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윤 씨에겐 징역 4년과 벌금 150만 원을 선고하고 900만 원의 추징을 명했다. 심 씨는 징역 2년6개월, 병원에 환자들을 소개하고 수수료를 챙긴 한 모 씨 등 브로커 2명은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권 씨가 태아를 살해할 의도가 없었으며, 살인에 대한 미필적 고의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산모가 출산 전 태아 처리 절차에 동의했고 사산 경위를 적극적으로 묻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필적 고의를 인정했던 1심 판단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산모가 브로커들에게 아이가 사산된 상태로 나왔는지 의료진에게 물어봐 달라고 했고, 브로커로부터 '그렇다'는 답을 들은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경위를 묻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긴 어렵다"며 "태아 처리 동의서에 서명한 건 사체 처리를 위임한다는 내용의 통상적인 절차일 뿐, 의료진의 살해를 용인한 것으로 볼 순 없다"고 판시했다.
의료진의 살인 혐의는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이들이 임신중절 수술을 진행하게 된 배경에 산모의 '자기결정권'이 있었다는 점을 감형 사유로 참작했다.
재판부는 "임신한 여성이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할지 결정할 권리는 헌법상 인격권에서 파생되는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며 "산모 권 씨의 종결 의사에서 비롯한 범행인 점은 양형에 참작한다"고 설명했다.
1심에서 11억5016만 원으로 특정된 윤 씨의 범죄 수익도 지나치게 책정됐다며 권 씨가 지급한 수술비 900만 원만 살인 혐의에 관한 범죄 수익으로 인정했다.
다만 윤 씨가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시킨 태아를 사망하게 한 뒤 태아가 사산한 것처럼 허위 기록을 작성하고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병원 직원들에게 허위 진술을 지시한 혐의는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선고 직후 여성단체는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부의 용기 있고 현명한 판결을 환영한다"면서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 2019년 이후 7년간 이어진 입법 공백을 하루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산모 권 씨의 변호인인 김명선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산모 개인이 형사처벌을 면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의의가 있다"며 "낙태죄가 폐지된 후 대체 입법이 미비한 동안 산모와 의료진이 겪어온 혼란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항소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산부인과 전문의 역시 "입법 지연으로 임신중지 접근이 늦어지면서 발생한 위험을 그동안 산모와 의료진 개인이 오롯이 짊어져 왔다"며 "필수의료 서비스가 된 임신중절 수술을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도록 보건의료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건은 권 씨가 2024년 6월 유튜브에 자신의 임신중절 수술 경험을 올린 뒤, 같은 해 7월 보건복지부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시작됐다.
앞서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이진관 부장판사)는 지난 3월 △권 씨 징역 3년·집행유예 5년 △윤 씨 징역 6년·벌금 150만 원·추징금 11억5000여만 원 △심 씨 징역 4년을 선고한 바 있다.
ye9@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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