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명 시민 소액 후원 모아 마포구에 '새 둥지'

[더팩트ㅣ설상미 기자] 추석 연휴를 앞둔 2일 오후 1시, 햇살이 통창을 가득 채운 서울 마포구 기쁨나눔재단 휴게실. 진료가 시작되기도 전에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앳된 여성 청소년은 취재진 옆자리에 몸을 기댄 채 작은 시집과 휴대폰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익숙한 공간인 듯, 편안한 듯, 지극히 평범했다. 또 다른 청소년은 "안녕히 계세요"라며 해사한 웃음을 남기고 센터를 떠났다. 이날은 전국 최초 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이 새 둥지를 틀고 아이들을 다시 맞은 지 세 번째 되는 날이다.
나는봄은 시민 후원으로 지난 9월 18일 다시 문을 열었다. 지난 7월 운영이 중단된 지 두 달 만이다. 185명의 시민이 2000만 원의 후원금을 보냈다. 1만 원대의 소액 후원이 모여 큰 변화가 일어났다. 후원금 정산 과정을 사단법인 '희망씨'가 도왔고, 의료기구 마련에는 녹색병원이 힘을 보탰다. 여성계·노동계 등 시민단체들도 하나둘 손을 내밀었다. 무엇보다 기쁨나눔재단이 센터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해 운영 재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봄은 매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운영되며, 의사와 간호사, 활동가 4명이 상주한다. 당연히 모두 무급으로 일한다.

나는봄은 2013년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설립돼 매년 2000명을 지원했다. 성매매·성폭력·임신·탈가정 등을 겪은 위기 청소년에게 무료 의료와 상담 서비스를 제공했다. 나는봄을 위탁 운영하는 막달레나공동체가 지난 3월 수탁 종결 의사를 밝혔고, 시는 위·수탁 협약 기간 만료와 동시에 센터 운영을 종료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센터는 지난 7월 끝내 문을 닫았다. 시는 2026년 나는봄을 대신해 통합지원센터를 출범시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나는봄 운영 종료 과정에 따른 잡음은 예상된 수순이었다. 시는 운영 중단 사유로 하루 이용 인원 부족을 들었다. 시가 집계한 하루 평균 이용 인원은 0.8명. 반면 센터 측은 진료일에는 "매일 10~15명이 방문한다"며 반박했다. 한 명이 여러 차례 방문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 연인원은 한 해 등록 인원인 300명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이다. 서울시 집계는 연간 신규 이용자 수를 365일로 단순 나눈 계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온라인 상담 등 서비스까지 포함하면 실제 이용률은 훨씬 높다고 한다.
재정사업 평가 '미흡' 판정 역시 시의 운영 중단 근거였으나, 이와 상반되는 평가도 나왔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이 확보한 '서울시 민간위탁 종합성과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나는봄은 총점 79.93점으로 대상 기관 61곳 평균 78.52점보다 높았다. 75점 미만 기관이 대상인 '위탁사업 재공모 절차'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센터는 보고서에서 "사회복지사, 성매매 방지 상담원, 여성의학과 전문의 등으로 구성돼 위탁 업무 수행에 필요한 전문성을 갖췄다"고 기록됐다. 일각에서 나는봄 운영 중단이 지난해 서울시사회서비스원(서사원) 해산과 마찬가지로 '전임 시장 정책 지우기'라는 의심이 나오는 배경이다.

문제는 위기 청소년들이 센터 재개소까지 의료 공백을 견뎌야 한다는 점이다. 센터는 상담과 의료비, 주거·학업 지원을 무료로 제공해왔을 뿐 아니라, 자궁경부암·성병 검사, 초음파 검사 등 산부인과 진료까지 지원했다. 이는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위기 청소년들이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기 쉬운 현실을 고려한 조치였다. 결국 제도권 병원을 이용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센터는 사실상 마지막 '보루'로 기능해왔다.
의료 공백에 따른 부작용도 곳곳에서 나타났다. 센터 관계자는 "센터 공백기 동안 실종 신고가 들어간 친구도 있었고, 동행 과정에서 불편함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전했다. 3년간 나는봄을 이용해 온 강민지(가명·19)씨는 "센터를 닫은 후에 앞으로 진료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막막해 걱정했다"라며 "연계된 센터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았는데, 원래 센터에서 받았던 의료 서비스만큼 받지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제도권 도움을 받기 어려운 이들의 특성상, 조치가 늦어지면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기 쉽다. 실제 응급 피임약이 필요하거나 부정출혈 등 증상을 겪는 사례도 있었다. 센터에서 근무하는 이영희 산부인과 전문의는 "자궁경부암 같은 경우, 증상이 거의 없어 아이들이 본인이 감염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진료 공백이 길어지면 이들이 감당해야 할 위험이 커진다"고 설명했다.

센터는 위기청소년의 건강권을 위해 진료와 상담을 병행하는 체계를 이어갈 계획이다. 단순한 의료 서비스 제공을 넘어, 장시간 상담과 지속적인 돌봄까지 포함한다. 한 아이당 상담은 약 1시간 내외로 진행되며, 위기청소년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지원이 이뤄진다. 아울러 기존 규제로 지원받기 어려웠던 아이들도 제약 없이 도울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이영희 산부인과 전문의는 "당장 한시가 급한 친구들이 많고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위기 청소년들이 있어, 진료를 하지 못할 때 부채의식으로 마음이 불편했다"라며 "아이들이 조건과 규제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아이들만을 위한 공간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이가희 사회복지사는 "센터는 단순 지원을 넘어 청소년 권익과 건강권을 알리고 보장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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