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내부 "정체성 포기 참담해"
"인권적 사안들 폐기 위험" 지적도
[더팩트ㅣ황지향 기자]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만장일치로 운영하던 소위원회 규정을 변경하자 내부 반발이 확산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인권 문제에 충분한 논의 없이 안건이 폐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29일 인권위에 따르면 전날 열린 제20차 전원위원회(전원위)는 '소위원회에서 의견 불일치 때의 처리' 안건을 의결했다. 이 안건은 소위원회 구성위원 1명만 반대하더라도 진정을 전원위에 회부하지 않고 기각 또는 각하할 수 있도록 운영 방식을 변경하는 것이 골자다. 재적 위원 11명 중 찬성 6명, 반대 4명으로 안건이 통과됐으며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기권했다.
그간 인권위 소위원회는 만장일치가 되면 곧바로 공식 입장이나 권고를 낼 수 있고 1명이라도 반대하면 합의에 이를 때까지 토의하거나 전원위에 넘겨 논의해왔다.
하지만 이번 변경으로 인권위 안팎에서 합의제 기능이 약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인권위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기각 또는 각하가 가능해지면서 인권보호 기능이 약화되고 진정인들이 구제 기회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란 지적이다.
특히 인권위 내부에서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인권위 관계자는 "사실상 인권위가 정체성과도 같은 합의제 정신을 포기한 것"이라며 "참담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내부 구성원들 모두 참담함을 느끼고 있다"며 "앞으로는 설득이나 협의 과정 없이 정치 성향이나 이념 등에 따라 표결로만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국가인권위원회지부(인권위노조)는 이날 논평을 내고 "인권위를 합의제 기구로 만든 목적은 그 어떤 정권이 오더라도 정권에 휘둘리지 않고 다양한 배경과 이해가 있는 위원들이 서로 합의해 결정하고 운영하란 의미"라며 "해당 안건이 가결된 것은 인권위 설립 이후 23년간 견지해 왔던 합의제 정신이 소멸된 날"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의결 방식의 변경은 위원회 중대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공청회나 토론회 등 민주적인 숙의 절차 없이 다수의 표결로 강행됐다"며 "새로운 해석으로 의결한 다른 모든 사건의 위법성을 추인해주는 결과를 낳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35개 인권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도 성명을 내고 "합의제 정신을 폐기하고 인권위의 존립가치를 훼손하는 이번 개악 의결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의결 즉각 철회와 안 위원장과 찬성표를 던진 6명 위원의 전원 사퇴를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충분한 논의 과정 없이 안건이 폐기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반대 의견이 있는데도 안건이 각하 또는 기각되면 다양한 인권적 사안들이 폐기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며 "인권위가 그 배경을 잘 설명해 주지 못한다면 사회적 지지나 신뢰 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중립을 지켜야 하는 인권 문제에 위원들조차 진영 논리에 빠져서 정치 성향을 반영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며 "한국 사회는 특히 경제 발전에 비해 인권은 모든 측면에서 발전하지 못한 상황이라 사각지대에 놓인 인권 문제가 더욱 배척되진 않을지 우려스럽다"고 강조했다.
이번 규정 변경은 지난 2022년 1월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수요집회 현장에서 발생하는 인권 침해를 정부가 방치한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출한 데서 비롯됐다. 해당 진정은 당시 소위원장이었던 김용원 위원이 주관했던 소위원회에서 만장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위원 3명 중 인용 1명, 기각 2명이었는데 김 위원은 해당 사건을 기각했다.
이에 정의연은 인권위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다. 법원은 지난 7월 "의결정족수인 위원 3명의 찬성 없이 이뤄진 (기각 결정은) 위법하다"며 정의연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김 위원을 중심으로 일부 인권위원들은 진정 처리의 시급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며 각하 요건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규정 개정을 추진해 왔다. 이번에 14번째 상정 만에 의결됐다.
hyang@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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