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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지왕①] 서른여섯, 4평 원룸서 꿈을 꾼다…무명배우 홍휘영 이야기

  • 사회 | 2023-10-10 00:00

'암 투병' 어머니 간병 후 다시 무대로
공연 쉴 땐 아르바이트로 생계 유지
고달픈 무명 생활…"그래도 행복해"


무명배우 홍휘영(36) 씨가 <더팩트>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세정 기자
무명배우 홍휘영(36) 씨가 <더팩트>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세정 기자

전세계 한류 열풍에 칸영화제 남녀 주연배우상 수상자까지 배출한 대한민국의 화려한 무대 뒤에는 수많은 '희극지왕'이 있다. 무명의 고단함을 이겨내며 연기의 꿈을 키우는 이들이다. <더팩트>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왜 이처럼 배우의 길은 바늘구멍일 수밖에 없을까. 그 구조적 문제까지 3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주>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바다 앞에 선 남성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남자는 거친 파도를 향해 "노력! 분투!"라고 크게 소리치고 돌아선다. '사우'(주성치)는 단역을 전전하는 무명배우다. 그러나 연기 철학만큼은 남다르다. 물론 알아주는 이는 없다. 촬영장에선 민폐만 끼치고, 점심 도시락도 받지 못하는 서러운 신세다. 그래도 연기를 향한 열정은 알 파치노(?) 못지않다. 동네 주민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잠들기 전엔 스타니슬랍스키의 책을 읽는다.

영화 '희극지왕'은 루저의 성공기를 다룬, 다분히 주성치스러운 스토리지만 애절하다. 작품을 관통하는 소재는 연기다. 뭇사람들에게 사우는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우에게 연기는 인생 그 자체다. 정말 배가 고파서 촬영장 도시락을 찾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엄연히 배우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더 커서 아닐까. 그래서인지 도시락에 대한 집착은 처절하다. '노력과 분투' 역시 공허한 외침이라기보단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간절한 다짐이다. 누가 이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리.

사우 같은 무명배우 다수는 아마도 연기를 위해 먹고 살지 않을까 싶다. 무대에 서기 위해, 단 몇초라도 화면에 나오기 위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간다. 허나 열정만으론 버티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아무튼 서론이 길었다. 희극지왕 이야기는 이 사람을 소개하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더팩트>는 배우의 꿈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또 다른 '사우' 홍휘영(36) 씨를 소개하려 한다.

휘영 씨를 알게 된 건 유튜브 알고리즘 덕이다. 평소 고독한 이들의 '먹방'을 종종 본 탓에 휘영 씨 영상을 자연스레 접했다. 화려한 영상미는 없다. 반주 한잔을 기울이며 진솔하게 무명배우의 애환을 털어내는 모습에 정주행을 시작하게 된다.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마음에 연락을 건넸고, 가을에 접어들 무렵 휘영 씨를 만날 수 있었다.

휘영 씨는 유튜브를 통해 무명배우의 생활을 전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무명똥배우'
휘영 씨는 유튜브를 통해 무명배우의 생활을 전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무명똥배우'

무명배우에게 '인터뷰'라는 단어가 꽤나 부담으로 다가왔나 보다. 휘영 씨는 연신 두손 깍지를 꼈다 풀었다 했다. "살면서 기자님을 만나는 게 처음이네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 저도 배우랑 밥 먹는 건 처음인데요? 영광입니다." 가볍게 몇 마디를 주고받자 이내 휘영 씨의 얼굴 근육이 말랑하게 풀어졌다. 역시 배우는 배우다. 긴장이 떠난 얼굴과 눈빛엔 기쁨부터 슬픔까지 온갖 감정이 금세 차오른다.

#1막. 연극학부에 간 학생회장

고교 시절 휘영 씨는 유독 문학을 좋아했다. 막연히 국어교육과에 가고 싶었다. 그런 휘영 씨에게 배우의 꿈이 찾아온 건 2학년 때 학생회장이 되면서다. 휘영 씨는 마이크 하나로 강당을 휘어잡았다. 수백 명 앞에서도 이상하게 떨리지 않았다. 더 큰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갈망이 끓어올랐다.

"뭐? 네가?" 연극영화과에 가겠다는 아들의 고백에 부모님 반응은 냉랭했다. 고집 센 아들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가출까지 감행하면서 허락을 받아낸 휘영 씨는 동국대 연극학부에 들어갔다. 연기 공부는 즐거웠다. 어느새 어머니도 아들의 '열혈 팬'이 됐다. "넌 잘될 거야"라는 어머니의 격려는 휘영 씨를 항상 일어서게 했다. 유명한 배우가 돼 어머니를 호강시켜 주고 싶었다.

어머니의 응원 덕일까. 대학 4학년 무렵 휘영 씨는 꿈꾸던 대학로 무대에 올랐다. 첫 작품이 끝나고 또 새로운 작품이 들어왔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언젠간 배우로 자리 잡을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엄마가 많이 아프다. 집으로 와라."

휘영 씨는 28세에 배우 생활을 잠시 접고 암 투병 중인 어머니를 2년간 보살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유튜브 채널 '무명똥배우'
휘영 씨는 28세에 배우 생활을 잠시 접고 암 투병 중인 어머니를 2년간 보살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유튜브 채널 '무명똥배우'

#2막. 어머니 곁을 지킨 무명배우

어머니 얼굴이 노랬다. 담도암 3기였다. 놀란 아들에게 어머니는 "나 살 만큼 살았어"라고 덤덤히 말했다. 휘영 씨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어머니 몸속 종양은 휘영 씨 감정을 휘저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기도 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무너져 있을 순 없었다. 암 치료엔 돈이 많이 필요했으니까. 28세 청년은 배우의 꿈을 접어둔 채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졸음을 참고 밤에 일하고, 낮엔 지친 몸을 이끌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마와 힘겹게 싸우던 어머니는 2년 뒤 눈을 감았다. 그간 고생했다는 주변의 말은 크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성공한 모습을 끝내 보여드리지 못해 미안했다.

"기자님은 혹시 20대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휘영 씨가 물었다. 순간 '재벌집 막내아들'을 상상하며 "뭐 돌아가면 잘 살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답했다. 휘영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료비에 간병까지 짊어져야만 했던 20대였기에. 그래도 마냥 그 시간이 고통만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단련하는 계기가 됐다.

"힘들어서 그땐 연기 생각이 안 났어요. 20대 초반에 굶주려야 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현실이 됐어요. 서러운 일이 많았죠. 제가 인격적으로도 부족했는데 그때 많이 다듬어졌어요. 확 무너지면서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더라고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연기를 계속할 힘이 되기도 했다. 10년 가까이 무명 생활만 계속됐다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저랑 비슷한 배우들을 종종 만나요. 그분들은 공백기 없이 쭉 달려오다 보니까 (무명 생활에) 허탈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아요. 주사위를 계속 던지는데 반응이 없으면 지칠 수 있겠죠. 저는 그래도 중간에 쉬고 다시 시작한 거니까 덜 합니다."

휘영 씨는 4평 남짓한 원룸에 살고 있다. 공연을 쉴 땐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있다. /유튜브 채널 '무명똥배우'
휘영 씨는 4평 남짓한 원룸에 살고 있다. 공연을 쉴 땐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있다. /유튜브 채널 '무명똥배우'

#3막. 리부트:무명똥배우

휘영 씨는 4평 남짓한 원룸에 산다. 공연을 쉴 땐 아르바이트를 해야 월세나 생활비를 겨우 감당할 수 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떠안게 된 채무도 휘영 씨 발목을 잡는다. 무명배우의 삶은 산 정상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처럼 무겁기만 하다. 그러나 휘영 씨는 굴하지 않고 매일 바위를 산꼭대기로 끌어 올린다. 카뮈의 해석처럼 운명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면서 극복하려 한다.

모아둔 돈도 없고, 미래는 불안하지만 그래도 가끔 무대에 오를 수 있어 행복하다. 관객들과 호흡하면 마음이 벅차다. 뭔가 성취하고 싶다는 생각에 유튜브도 시작했다. 채널명은 '무명똥배우'. 왜 이름을 그리 지었냐 묻자 "말 그대로 제가 무명배우고, 배우로서의 가치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미소 지었다. 구독자는 2550명 정도다. 유튜브를 통해 팬도 몇 명 생겼다. 아직은 얼떨떨하기만 하다.

"얼마 전에 대전에서 공연했는데 구독자분들이 찾아왔어요. 놀랐어요. 부산에서도 오시고, 선물 주는 분도 있고. 인생에서 이런 거 처음이거든요. 제가 그렇게 멋진 스타일도 아니잖아요. 하하. 그런데도 어느 정도 매력을 발견해 주신 거니까. 자신감도 조금 생겼고, 행복합니다. 너무 소중하죠."

모아둔 돈도 없고, 미래는 불안하지만 그래도 무대에 오를 수 있어 행복하다. 휘영 씨는 연기를 계속 하고 싶다. /김세정 기자
모아둔 돈도 없고, 미래는 불안하지만 그래도 무대에 오를 수 있어 행복하다. 휘영 씨는 연기를 계속 하고 싶다. /김세정 기자

휘영 씨의 목표는 명쾌하다. 연기를 계속하고 싶다. 학교 강당에서 마이크를 잡던 그 시절 품었던 꿈을 실현하고 싶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 한다.

"배우님, 나중에 유명해지면 저랑 삼겹살 먹던 거 잊으면 안 됩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 말을 건넸다. 변치 않길 바란다기보단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당부였다. 무명배우가 아닌 명배우 홍휘영을 기대하며. "노력! 분투!"

sejungki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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