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 합의부 1심 처리기간 14개월 걸려
소가 상향·경력판사 투입도 체감은 아직
"법관 증원과 처우 개선 병행돼야" 진단
[더팩트ㅣ김시형 기자]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헌법 27조 3항)
지난해 전국 법원의 민사 합의부와 형사사건 1심 처리 기간 모두 전년 대비 늘어난 것으로 알려져 법조계에서는 신속한 재판을 위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송촉진법에 따르면 형사 사건은 공소가 제기된 지 6개월 내 선고해야 한다. 현행 민사소송법은 민사 사건이 접수된지 5개월 이내 선고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재판 현장에서 이 조항이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해 전국 법원 민사 합의부 1심 사건 평균 처리 기간은 14개월로 전년 대비 약 2개월 늘어났다. 1심 판결을 받는 데만 1년이 넘게 걸리는 셈이다.
형사사건 1심 처리 기간도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형사공판 1심 평균 처리 기간은 판사 한 명이 심리하는 단독부의 경우 178일, 판사 세 명이 심리하는 합의부의 경우 204일이었다. 이는 지난 2018년 대비 약 50일 가량 증가한 수치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도 지난 22일 퇴임사에서 재판 지연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김 전 대법원장은 "최근 제기되는 재판 지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법부의 저력이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며 "국민이 재판에서 지연된 정의로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가 추구해온 가치도 빛을 잃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법조계 "소가 올려도 재판 적체 해소 체감 못해"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민사 사건 처리 지체를 해소하기 위해 지난해 3월부터 단독재판부 사건 관할을 확대 조정하고, 이를 위해 단독부 관할 소가를 기존 2억 원에서 5억 원으로 상향했다.
가사재판 단독재판부 관할 소가도 올해 3월부터 같은 이유로 기존 2억 원에서 5억 원으로 상향됐다.
법원행정처는 지난 7월 민사 1심 단독관할 확대에 따른 재판부 수 조정 등으로 올해 1∼6월 상반기 전국 법원의 민사사건 처리 건수가 전년 대비 약 5.5%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민사합의부 사건이 줄어들고 단독 재판부가 늘면서 사건 처리 속도가 개선됐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법조계에서는 재판 적체 해소를 체감하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승우 민사전문변호사는 "(소가가 상향된 지) 1년 반 가까이 지났지만 재판 진행 속도 개선이 아직 특별히 체감되지 않는다"라며 "속도가 더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선됐다고 느끼기엔 시기상조라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가사재판 역시 상황이 비슷하다. 양나래 가사전문변호사는 "소가가 상향됐더라도 가사 사건이 워낙 많아 (재판이) 많이 밀려 있고, 서울가정법원의 경우 사건처리가 가장 빠른 곳인데도 사건이 정말 많다"며 "(소가 상향이) 좋은 개선책이라고 보지만 유의미한 해결책일지는 미지수"라고 주장했다.
◆경력 판사 보강 투입도 '임시방편' 지적
전국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올해 고액 단독사건을 담당하는 고액단독 재판부를 4개 더 확대한 데 이어 최근 재판 지연을 해소하기 위해 '장기 미제' 사건을 중점적으로 처리하는 법관 2명을 추가 배치했다.
기업 전담 민사재판부 4곳에 법조경력 10년 이상의 판사를 지난 달부터 보강 투입했다. 이들은 장기간 결론을 내지 못했거나 분쟁이 심한 사건을 맡게 된다. 중앙지법은 시범 운영 후 내년 2월 확대 실시를 검토할 계획이다.
중앙지법 관계자는 "중앙지법의 경우 기업, 노동, 건설 사건 등 분쟁이 심한 고분쟁성 사건이 집중돼 있다"며 "시행된 지 한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분쟁성 장기미제만 전담하는 판사를 투입한 것이라 사건 처리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역시 '임시 방편'에 그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무법인 일로 정구승 변호사는 "재판 지연 '현상' 자체를 해결하기에 도움이 될 순 있겠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며 "본질적으로 재판 지연 문제를 해결하려면 '법관 증원'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 독일 '재판지연보상법' 미국 '상고허가제'
독일의 경우 재판이 지연돼 불이익을 본 국민에게 정부가 보상하는 재판 지연 보상법이 2011년 도입돼 시행 중이다. 소송 당사자는 재판이 지연될 경우 법원에 경고장을 직접 보낼 수 있으며, 재판 지연으로 불이익을 받은 경우 상급 법원에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재판 지연으로 받을 수 있는 배상 금액은 1년당 1200유로(약 160만 원)에 달한다.
미국의 경우 연방대법원이 상고 허가제를 운영하고 있어 모든 상고 사건을 의무적으로 심사할 필요가 없다. 이에 한 해 접수되는 사건들 중 실제 본안심리가 이뤄지는 건은 100건 내외에 그친다.
일본에서는 상고 남용을 막기 위해 항소심 법원이 상고를 각하할 수 있다. 장기 미제 사건 적체를 해결하기 위해 2003년 재판 신속화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최고재판소가 사건 처리 장기화 원인 등을 조사·분석해 검증 결과를 2년마다 국민에게 공표하고도 있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도 재판 지연 문제에 대해 독일이나 일본처럼 신속한 재판을 보장하는 법률 제정의 필요성을 밝혀온 것으로 전해졌다.
◆"법관 증원·처우 개선 가장 시급" 한목소리
법조계에서는 재판 지연을 해결하기 위한 핵심 대안으로 판사 증원을 꼽는다. 이승우 변호사는 "실무에서는 법관 수가 너무 부족하니까 법관을 늘려야한다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2027년까지 법관 정원을 370명 늘려 3584명을 확보하는 법관 정원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2년째 계류돼있다. 그나마 사법정책연구원 연구 결과 적정선이라고 파악한 680~980명보다 적은 수치다.
김 전 대법원장 체제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 폐지 등이 판사들의 업무 의욕을 떨어뜨렸다는 지적도 있지만 본질은 법관의 열악한 근무환경이라는 의견이 많다. 정구승 변호사는 "과거처럼 판사들이 몸을 갈아 넣으며 밤을 새는 분위기는 많이 사라진게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판사가 몸을 혹사해야 유지됐던 시스템 자체가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이에 법관 증원 뿐 아니라 법관의 처우 개선도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다. 경력있는 변호사를 법관으로 선발하는 경력법관 제도가 정착하지 못하는 원인으로도 법관의 처우 문제가 꼽힌다. 급여와 연금 등 경제적 처우 상향, 전근 최소화, 정년 연장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한규 법무법인 공간 변호사도 "현재 법관들의 업무량은 사명감만으로 버티기 힘든 구조로 복지 개선 등 법관에 대한 처우 개선과 판사 수 증원이 병행돼야 한다"며 "법관 처우 개선은 판사보다 재판을 받는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했다.
rocker@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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