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체력이 달려 앉아있을 수가"
"대법원-외무부 소통 '혼네'로 문제없다"
헌재 정보 넘긴 판사 "용기가 없었다. 후회"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체력이 따라가지 못해서… 더 이상 여기 앉아있을 수가…"
2019년 7월 19일 오후 11시 5분, 재판이 시작된 지 13시간이 넘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털어놓은 말이다. 같은 해 3월 25일 시작한 재판이 4개월차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체력 부족' 호소가 무색하게도 재판은 4년 7개월 동안 이어졌고 지난 15일, 드디어 종결됐다. 재판 초기에는 심야 재판도 흔했지만 주요 증인신문이 마무리되고,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오후 7시를 넘기는 야간 재판은 사라졌다.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진행된 만큼 재판에 나온 이들도, 재판에서 나온 말도 많았다. <더팩트>는 '사법농단' 의혹의 뼈대인 △강제징용 재판 지연 △헌법재판소 동향 파악 △통합진보당 재판 개입 관련 혐의를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순간을 정리해 봤다.
◆강제동원 재판 지연에 "혼네"(본심)…아니면 "개망신"
사법농단의 가장 대표적인 혐의는 한일청구권협정 정신을 계승한 박근혜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재판에 개입해 선고를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 외교부와 접촉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재판 거래'로 판이 커지는데 일조한 혐의기도 하다. 청와대와 외교부, 대법원이라는 굵직한 국가기관의 간부가 주고받은 문건에 담긴 용어는 그다지 점잖지 않았다.
2019년 8월 7일 공판에는 일본 전범기업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의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 대리인을 맡았던 김앤장 송무팀 한상호 변호사가 증인으로 나왔다. 2015년 5월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한상호 변호사에게 김앤장이 외교부 의견서 제출 촉구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대법원에 재상고된 강제동원 피해자 승소 판결을 뒤집으려면 '강제징용자의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는 취지의 외교부 의견서가 필요했다. 한 변호사는 변호사 윤리규정에 따라 법정에서 말을 아꼈지만 그의 메모는 원색적이었다. 그가 김앤장 고문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에게 듣고 적은 메모에는 '2015 11/10. 유명환. 조태열 차관 미팅. 외교부-대법원 커뮤니케이션 문제없나? 혼네('본심'이라는 뜻의 일본어)로? 문제없다'는 문구가 담겼다.
이듬해 8월 21일 공판에는 김규현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증인석에 앉았다. 김 전 수석의 2015년 업무수첩에는 박근혜 정부의 의중이 잘 드러나 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 김 전 수석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 적었다. "강제징용 건과 관련해 조속히 정부 의견을 대법원에 보내라. 개망신이 안되도록, 국격이 손상되지 않도록." 김 전 수석은 "국익을 최대한 증진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해명했다.
◆헌재소장 발언에 "대법원장이 언짢아 하시더라"
헌재는 헌법 분쟁이나 의의를 사법적 절차에 따라 해결하는 특별재판소다. 대법원은 법의 구체적 해석과 적용 등을 담당하는 사법부의 최고기관이다. '최고'가 문제였다. 검찰은 헌재를 상대로 대법원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법관을 파견해 내부 자료를 빼돌렸다고 본다. 헌재에 계류 중인 사건의 내밀한 정보를 수집해 먼저 대법원에서 선고를 내리는 등 '선제공격'을 하기 위해서다.
2020년 5월 6일 증인으로 나온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증언에는 '최고기관장' 양 전 대법원장이 헌재에 품은 미묘한 감정이 묻어난다. 박한철 당시 헌재소장이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대법원이 헌법재판관 3명을 지명하는 건 헌법재판관의 민주적 정당성을 희석시킨다'라고 발언하면서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이 전 상임위원은 박 전 소장의 발언 후 대법원 상황을 "실장회의에서 차장(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께 '대법원장님이 언짢아하신다'라고 들었다"라고 했다.
헌재 파견법관은 헌재에 계류 중인 현안부터 차기 소장에 관한 보고서 등을 작성해 대법원에 넘겼다. 이 전 상임위원은 이 같은 문건들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까지 흘러 들어갔냐는 질문에 대부분 "대법원장이 직접 보고받았다는 '장면'은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라고 답했다. 당시 헌재에 파견된 법관은 최모 부장판사였다. 최 부장판사는 이 법정에서 자신이 "애매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었다며 "용기를 냈어야 하는데, 후회한다"라고 증언했다. 사법농단의 또 다른 핵심인물인 임종헌 전 차장의 공판 증인석에서도 "지금 같으면 (대법원 지시를) 거절했을 거다. 후회한다"라고 말했다.
◆재판 개입 혐의 대법 간부 "부적절하지만 금지는 아냐"
검찰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옛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낸 지위확인소송의 1심을 맡은 재판부가 2015년 11월 판결을 선고하기 전 "의원직 상실 결정 권한은 법원에 있다"는 법원행정처 내부 지침을 전달했다. 앞서 통진당 의원들은 헌재 결정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상태였는데, 검찰은 의원직 상실 결정은 오로지 법원만이 할 수 있다는 '위상 강화' 수단으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고 재판에 개입했다고 본다.
2020년 5월 27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자신도 기소된 재판 개입 혐의에 대한 입장을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도 밝히게 됐다. 이 전 기조실장은 "한 번 읽어나 보시라는 취지로 (자료를) 담당 재판부에 드렸는데 그 당시에는 꼭 금지된 일이 아니었다"며 "허용된 행위라기보다, 금지된 건 아니라 생각했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지금 돌이켜 보면 적절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적절하지 않지만 금지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문건을 건네 받은 재판장은 2015년 11월 "이들의 의원직 상실은 헌재가 헌법 해석·적용에 대한 최종 권한으로 내린 결정으로, 법원은 이를 다투거나 다시 심리·판단할 수 없다"며 통진당 의원들이 낸 소송을 각하했다. 법원행정처 문건 취지와는 반대되는 결정과 판시였다. 이후 해당 재판장의 근무평정에는 "일부 사건에서 객관적인 여러 사정 검토가 부족한 채 자신의 주관을 강하게 반영했다고 보이는 경우가 있음", "논리적 모순이나 입증 책임에 반하는 판시도 보임", "꾸준히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나 질적인 면에서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음" 등의 인색한 평가가 달렸다.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이 '꼭 금지된 일이 아니'라는 이 전 기조실장의 증언은 자신의 재판 1심에서 불리하게 작용된 논리였다. 이 전 기조실장은 자신의 재판 1심에서 재판 개입 혐의 등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사법농단 재판의 쟁점은 '재판 지적 권한'이다. 종전까지 사법농단 관련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이들은 재판에 개입한 사실 관계가 인정됐는데도 애초 법관의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 무죄를 선고받았다. '직권 없이는 직권남용도 없다'는 법리다.
하지만 이 전 기조실장 등의 1심 재판부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에 특정 사건 재판사무의 핵심 영역을 지적할 권한, 즉 '지적 권한'이 있어서 직권남용도 성립할 수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 전 기조실장의 재판 개입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고 양 전 대법원장 등의 공모도 인정했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는 "헌법·법원조직법·구 법원사무기구규칙 등 관련 법령을 모두 살펴봐도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의 지적권한을 규정하는 명문의 규정이 없다"라며 판결을 뒤집었다. 이에 따라 대법원장 또는 법원행정처의 공모가 있어야만 인정되는 재판 개입은 아예 무죄로 뒤집혔고, 양 전 대법원장 등의 공모도 인정되지 않았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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