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피해 치유 '해맑음센터'
치유 수업·봉사활동·심리상담 지원
건물 노후로 균열 등 안전문제
"폭력의 순간에는 인간의 존엄, 명예, 영광 같은 걸 잃게 된다. 피해자들이 '원점이 되는 상태'를 응원한다".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는 드라마 제목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현실에서는 피해자들이 '원점'이 될 수 있을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드라마'와 현실은 얼마나 부합할까. <더팩트>는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문동은'들의 상처를 4회에 걸쳐 들여다본다.<편집자주>
[더팩트ㅣ대전=정채영 기자] KTX 대전역에서 차로 30분. 굽이진 시골길을 따라 비닐하우스를 지나면 한 층짜리 알록달록한 폐교가 나온다. '해맑음'이라는 글자가 적힌 입구에 다가가면 서툰 솜씨로 칠한 페인트칠이 반긴다. 이곳은 학교폭력 피해학생의 치유를 돕는 '해맑음센터'다.
사단법인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가 운영하는 해맑음센터는 기숙형 학교폭력 피해 치유 전담기관이다. 피해학생들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의 출석을 인정받을 수 있는 대안교육기관이다.
'학교폭력 피해 치유 전담기관' 이름만 들으면 상처가 있는 공간이라고 예상하지만, 해맑음은 행복이 가득했다. <더팩트> 취재진이 방문한 2월은 이미 12명의 아이들이 수료하고 학교로 돌아가 텅 빈 곳이었지만 아이들의 추억으로 온기가 가득했다.
복도는 온통 아이들이 그린 그림과 시, 학교폭력 예방 포스터가 전시돼 있었다. 재활용품에 심은 다육이는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 학생들의 개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해맑음의 치유 수업에서는 이렇게 아이들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해맑음에서는 국어·영어·수학 교육과 함께 미술치유, 동작치유 등 피해학생의 회복을 돕는 다양한 치유 수업이 진행된다. 심리상담도 수시로 받을 수 있어 피해 학생들이 언제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조정실(65) 센터장은 2013년 7월 이곳에 오롯이 피해학생을 위한 센터를 열었다.
"아이가 학교에 돌아갈 수 있겠다 싶으면 적응 기간을 두고 학교로 다시 보내요. 담임선생님과 상담 선생님이 살펴보고 학교에 다녀도 되겠구나 싶으면 해맑음을 퇴소하고 수료합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싶으면 다시 와서 치유해요."
대부분 아이들은 3월에 학교 적응 기간을 갖고 도움이 필요하면 4월에 온다. 해맑음의 목표는 아이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 적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학교는 작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여기도 학교잖아!" 소리쳐도 '왜'라고 묻지 않는 곳
외관은 시골 학교와 다름없다. 하지만 학교라는 이름마저 두려운 아이들을 위해 센터라는 명칭을 쓴다. 처음 이곳에 온 아이들은 교문을 보고 달아나거나 소리치기도 했다. 피해 학생들에게 학교는 그만큼 두려운 공간이다.
해맑음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왜'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오지 않아도, 화장실에서 울거나 소리쳐도 다그치지 않는다.
"학생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둬요. 처음 오면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서 하루 종일 서 있는 아이들도 있어요. 왜 그런 건지 물어보지 않아요. 같이 산책하고 아이들이 손잡고 밥 먹으러 가자, 놀러 가자고 하게끔 해줘요. 이틀만 있어도 표정이 달라져요."
간혹 가해 성향을 가진 아이들도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돼서 해맑음에 오기도 한다. 가해 성향을 가진 아이들은 여기서도 가해 성향을 보인다.
"가해 성향 아이들이 들어오면 다른 아이들이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 밤에 밖에 나와서 배회를 하곤 해요. 그걸 보면 '아, 오늘 들어온 아이가 가해 성향이 있는 아이구나' 알게 되죠. 여기는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고, 피해 학생 치유 센터이기 때문에 같이 있을 수는 없어요. 순수 피해 학생인지 물어보면 아니라는 답변이 오죠."
이런 경우 대부분 아이가 교화되리라 기대하고 보낸 것일 때가 많다.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다른 피해 아이들에게는 고통이다. 해맑음은 이 아이들이 각자에게 맞는 시설에 가도록 피해 학생들과 분리한다. 여기는 교화시설이 아니라 치유시설이다.
◆아이들 키만 한 과일나무…내 옆엔 늘 선생님이 있다
센터 곳곳에 심어진 나무는 모두 과일나무다. 아이들이 과실을 맺길 바라는 선생님들이 바람이 담겼다. 키도 작다. 아이들이 언제든 따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꽃인데 꺾인 거잖아요. 열매가 됐으면 좋겠어요.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열매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꽃 대신 열매가 맺히는 나무를 심었어요."
논밭 사이에 있는 해맑음은 그 흔한 편의점도 찾을 수 없다. 대신 아이들은 '화분에 물 주기'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해맑음의 화폐 '써니'를 벌 수 있다. 써니를 모으면 해맑음에서 과자도, 음료도 사 먹을 수 있다.
해맑음에서 시간을 보낸 피해학생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감을 갖게 된다. 눈빛부터 달라진 아이들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부터 변화를 보인다. 나아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도전을 꿈꾼다. 누구보다 학교를 두려워하지만 누구보다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아이들이다.
선생님은 학교에 돌아가 가해 학생을 만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려준다. 덕분에 해맑음에서 지낸 97%의 아이들은 학교에 다시 돌아가 적응한다.
해맑음에도 여느 학교와 다를 것 없는 규칙이 있다. 규칙을 어기면 108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선생님과 함께한다는 게 일반학교와는 다르다. 아이들은 내가 잘못을 해서 벌을 받아도 늘 옆에 함께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받는다.
9년 차 해맑음 음악 교사 윤석진(40) 선생님은 오랜 시간 학교폭력 피해를 당했던 학생을 잊지 못한다. 중·고등학교 내내 폭력을 당하고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해맑음에 온 아이는 하늘만 보고 있었다.
"어느 날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아이가 밖에서 노래를 듣고 있더라고요. 옆에만 앉아있어도 된다고 데리고 들어왔어요. 자기 얘기를 하나씩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힘들었던 이야기를 랩으로 만들어서 표현해봤어요. 자기표현을 배우고 칭찬도 받고 점점 변하기 시작했어요. 해맑음에 온 지 5~6개월 만의 변화였어요."
교실 한편에 큰 나무에는 아이들과 부모님의 소망과 고마움이 걸려있다. "나의 바람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입니다." "학폭 피해의 기억을 잊으려면 수십 년이 걸린다고 하더라. 해맑음센터 덕분에 수십 년을 같이했을 악몽 같은 순간들이 행복한 기억과 추억으로 자리매김했구나."
◆기울어진 피해 학생의 '고향'
아이들은 이곳을 고향이라고 말한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연인을 데려오기도 한다. "나 여기 출신이야"라며 해맑음을 소개한다. 학교폭력 피해 학생이었다는 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많은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해준 센터지만, 최근 기울어진 건물 때문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상처받고 온 아이들을 낙후된 센터에 보내는 부모들은 속상하다. 이 때문에 해맑음에 방문한 5명 중 1명만 입소를 결정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지어진 지 60년이 된 센터는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곰팡이가 피어있다.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기숙사는 안전 문제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놨다. 지난해 해맑음의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관사에서 지냈다.
조 센터장의 바람은 안전한 공간에서 치유가 필요한 학생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부모님들은 어떻게 여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느냐고 해요. 그래도 아이들은 여기 있고 싶어 해요. 하루빨리 아이들이 안전한 시설에서 지낼 수 있게 새 부지를 선정해주길 바라요."
chaezero@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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