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균 가사노동 114분, 돌봄 126분
"가사노동, 도움 아닌 함께 하는 일"
[더팩트ㅣ정채영 기자·조소현 인턴기자] 지난해 11월 발표된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성인지 통계로 보는 서울 청년의 일과 삶' 연구 결과를 보면 10세 이하 아동이 있는 청년 맞벌이 양육자 중 여성은 하루 평균 272분 직장에서 일하고 114분 가사노동을 하며 126분 돌봄에 참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남성은 하루 근로 시간이 342분, 가사노동은 49분, 돌봄 시간은 80분이었다. 근로시간은 1시간 더 많지만 가사노동과 돌봄에 있어 여성의 부담은 압도적이다.
115년 전인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의 먼지 가득한 작업장에서 146명의 여성 노동자가 화재로 숨졌다. 1만50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뉴욕 한복판에 모였다. 유엔은 이날을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화했다.
한국은 1985년부터 공식적으로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39번째를 맞은 오늘도 누군가의 엄마, 아내이면서 노동자인 여성은 여전히 육아, 회사, 가사노동으로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는 '철인 엄마'
초등학교 3학년 첫째와 유치원생 둘째를 키우는 가인(가명, 47) 씨의 아침은 7시부터 시작된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시간 가장 먼저 일어나 아침 밥을 차린다. 7시 30분쯤 잠에서 깬 아이들은 익숙하게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든다.
시간이 8시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급하다. 먼저 학교에 가는 첫째를 준비시키기에 바쁘다. 머리를 빗고 옷을 고르는 일까지 모두 엄마의 몫이다. 가인 씨는 "오늘은 밥이라도 제때 먹어줘서 다행이다. 투정을 부리느라 학교 갈 시간을 다 잡아먹기도 한다"고 말했다.
"10분 남았다", "5분 남았다" 마치 경매장처럼 계속 시간 알림을 해줘야 아이들은 빨리 움직인다. 아침 시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은 "n분 남았어"였다.
첫째가 등교한 8시 30분. 이제 둘째가 유치원에 갈 시간이 다가왔다. 가인 씨는 "오늘 머리는 하나로 묶을까, 둘로 묶을까?", "영어책 찾아야 한다"라는 말을 하며 계속해서 둘째를 따라다니며 등원 준비를 했다.
"어제는 누구랑 놀았어? 요즘은 누구랑 제일 친해?" 아이들의 유치원 생활을 묻고 교감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다.
9시 딱 맞춰 오는 유치원 차에 둘째를 태워 보낸 가인 씨는 이제 노동자의 시간을 시작한다. 그나마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어 10시까지 출근하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겨우 옷 입을 시간만 남았다. 그 와중에도 전날 둘째가 한 숙제를 검사한다. 그에게는 숙제 검사가 숙제다. 빠르면 오후 7시 반쯤 퇴근한다. 빨래, 청소, 애들 씻기기, 숙제 검사가 남아있다.
가인 씨는 "주변에는 모두 나 같은 엄마들뿐"이라며 "남편도 육아에 참여하지만 아직 육아와 가사노동은 여성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는 "워킹맘들과 대화하면 남편들은 '도와준다'는 말을 한다"며 "육아와 가사노동에 잘 참여하는 남편은 '그런 남편 없다'고 말한다고 한다"고 헛웃음을 지었다.
가인 씨는 "세계여성의날이 있는지도 몰랐다. 오늘도 사회에서 여성은 엄마와 아내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도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 것"이라며 "철인 3종 경기를 뛰고 기절하는 하루"라고 자신의 일과를 설명했다.
◆자녀가 성인이 돼도 엄마는 '엄마', 노동자는 '노동자'
엄마들의 '워킹'과 '맘' 역할 병행은 자녀가 성인이 된다고 끝나지 않는다. 경기도의 한 공립 유치원에 다니는 특수 유아교사 양모(52) 씨는 두 자녀가 대학생이 됐어도 여전히 '7 to 10'의 일과를 소화한다.
양 씨의 하루 역시 어린 자녀를 둔 워킹맘들과 다를 바가 없다. 오전 7시에 기상해 남편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하루 노동이 시작된다. 식사 후에는 출근 준비를 한 뒤 오전 8시쯤 '지옥철'에 몸을 싣는다.
오전 9시 출근한 뒤에는 정신 없이 아이들을 교육했다. 개별 지도부터 음악, 요리 수업까지 진행하다 보면 금세 오후 1시 30분이다.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에도 처리해야 할 행정 업무가 쌓여 있다. 양 씨는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일한 뒤 오후 5시가 돼서야 퇴근한다.
남들보다 이른 퇴근이지만 노동은 끝나지 않았다. 제2의 직업인 '아내'와 '엄마'로 변신한다. 양 씨는 "남편이 요리를 해오던 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해야 한다"며 "주말에 반찬을 많이 해놓으면 평일에 따로 요리하지 않아도 돼 괜찮다"고 말했다. 양 씨는 오후 10시가 돼서야 처음으로 소파에 몸을 기대며 진정한 '퇴근'을 한다.
경기도 용인시 공공도서관 사서 정모(60) 씨도 워킹맘으로 산 지 13년이 됐다. 정 씨는 자녀를 낳기 전 지방에서 공공도서관 사서로 근무했다. 가정을 꾸리고 남편이 서울로 이직해 일을 그만뒀다.
아이가 커갈수록 남편의 벌이만으로 교육비 등을 채우기 힘들었다. 백화점과 무역회사 직원, 베이비 시터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워킹'을 시작한 이유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자 전공을 살려 다시 사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인생에 집중하고 싶어 (사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며 "성취와 경제적 도움이라는 측면에서 힘들어도 일을 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씨 역시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했다. 9시까지 출근한 뒤 도서관에서 대출과 반납, 상호대차 업무, 민원인 상담 등 일을 한다. 오후 6시에 귀가한 뒤에는 남편과 자녀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힘들지 않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정 씨는 "딸이 설거지와 빨래, 분리수거 등을 도와줘서 괜찮다"고 고마워했다. 정 씨에게도 딸의 가사노동은 당연한 것이 아닌 고마운 것이었다.
정 씨의 딸은 "엄마는 늘 집안일을 '돕는다'고 표현을 한다"며 "집안일은 가족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건데, 무의식중에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엄마와 아빠 둘 다 일을 하니, 가족 구성원도 다 함께 가사노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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