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사임부터 재판장과 설전까지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영화 '변호인' 명대사는 '재판이 아직 시작도 안 됐는데 피고인을 이미 죄인으로 취급하는 어떤 관행도 인정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018년 12월19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옛 변호인 황정근 변호사가 임 전 차장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 사건 두 번째 공판 준비기일에서 한 말이다. 황 변호사는 임 전 차장의 무죄를 주장하며 영화 '변호인'의 명대사를 인용했다. 같은해 12월10일 첫 공판준비기일부터 지난 28일 공판까지 100회, 932일을 맞은 임 전 차장의 재판은 재판부와 변호인과의 '전쟁'으로 요약된다.
영화 대사까지 인용하며 임 전 차장을 변호했던 황 변호사를 비롯한 변호인단이 대거 사임했고, 뒤늦게 열차에 올라탄 변호인은 별안간 자취를 감춰 검사는 물론 방청객까지 갸우뚱하게 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복귀한 변호인은 재판부의 공정성이 의심된다며 '독설'을 쏟아냈다.
임 전 차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의혹으로 2018년 11월 14일 재판에 넘겨졌다. '사법농단' 의혹 연루 법관 가운데 첫 기소였다. 그는 양 전 대법원장의 충실한 '메신저'로서 △박근혜 정부와 재판 거래 △헌법재판소 상대 대법원 위상 강화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와해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다.
재판은 기소 한 달여 만인 같은 해 12월 10일 첫 공판 준비기일로 막을 올렸다. 판·검사 출신이거나 경력 20년을 넘긴 변호사로 구성된 화려한 변호인단이었다.
방대한 공소사실로 검찰과 변호인의 공방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을 재판은 첫발을 떼기도 힘들었다. 2019년 1월 30일 첫 정식 공판을 앞두고 변호인단 11명이 집단 사임한 것이다. 공소장과 수사기록을 검토할 시간을 요청했지만 재판부가 준비기일을 종결하자 '항의성' 사임을 한 것이다.
국선 변호인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임 전 차장은 같은 해 2월 지금까지 함께하는 이병세 변호사를 선임했다. 이 변호사 역시 판사 출신으로 임 전 차장의 고교 후배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 배교연 변호사도 합류하면서 재판은 본격화됐다. 이들은 장장 8개월에 걸친 임 전 차장의 법관 기피 과정에서도 함께 했다.
임 전 차장 측은 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의 공정성을 문제 삼으며 법관 기피 신청을 냈으나 지난해 초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됐다. 윤 부장판사가 2017년 10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 김명수 대법원장이 마련한 자리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단죄를 강조했다는 것이 임 전 차장 측 주장이다. 그러나 기피 건은 '재판에 헌법·법률·명령 또는 규칙을 위반한 잘못이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8개월 만에 재판이 재개된 뒤 임 전 차장은 윤 부장판사와 간단한 안부도 주고받고, 보석 석방으로 염원했던 불구속 재판을 받게 됐다. 그렇게 재판이 안정화되는 듯했으나 이병세, 배교연 변호사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지난해 5월 18일 두 변호사가 사임계 없이 재판에 참여하지 않았고 재판부·검찰이 여러 차례 이유를 물었지만 임 전 차장은 '이유를 말하기 곤란하다'며 답을 피했다. 빈자리는 새로 선임된 전병관·이수진 변호사가 채웠다.
공판부장인 단성한 부장검사가 같은 해 6월 공판에서 이를 문제 삼으며 '저희(검찰)를 기망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자 임 전 차장은 '단 부장검사의 발언으로 피고인(본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법적 조처를 예고하기도 했다.
행방이 묘연했던 이 변호사는 사법농단 첫 유죄 판결 뒤 모습을 드러냈다. 4월 13일 약 1년 만에 윤 부장판사와 마주한 이 변호사는 기피 사유였던 '단죄 발언' 의혹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공정성 우려 해소를 위해서라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법원에 윤 부장판사 발언에 관한 사실조회도 신청했지만 답변이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재판부와 전쟁'에는 지난해 9월 28일 선임신고서를 제출한 임정수 변호사도 가세했다. 임 변호사는 16일 공판에서 증거자료를 일일이 낭독하는 방식으로 서증조사를 진행하자며 "제 말씀은 법에 있는 대로 하자는 것이다. 정 안되면 법개정운동 하셔야죠, 뭐"라고 꼬집었다. 요지 고지 방식도 형사소송법에 부합하는 서증조사라는 재판부 입장에도 "편의적인 발상"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임 변호사는 100회를 맞은 28일 공판에서도 윤 부장판사의 '단죄 발언' 의혹을 파헤치겠다며 김명수 대법원장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검찰은 반발했고 재판부는 채택 여부 결정은 보류하기로 했다.
재판이 100회를 돌파할 동안 '핵심 증인'에 대한 신문은 대부분 이뤄진 상황이다. 사법농단 첫 유죄 판결 당사자로 임 전 차장과의 공모가 인정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지난해 가을 증인신문을 마쳤다.
임 전 차장의 전임자였던 강형주 전 법원행정처 차장, 옛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개입 의혹 관련자인 이진만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증인신문도 같은 해 6월 진행됐다. 임 전 차장 등이 개입한 재판으로 지목된 사건 담당 판사였던 방창현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 이동원·노정희 대법관에 대한 신문도 지난해 모두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 재판의 선고는 아직 기약이 없다. 변호인단의 강력한 저항 속에 첫 재판 절차 이래 적어도 3년은 넘기지 않을 것이라던 예상은 흔들리고 있다. 결국 지루한 '전쟁'을 끝내기 위한 재판부의 결단이 임박한 것 아니냐는 말들이 나온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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