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진당 문건 읽어본 적 없다" 부인…검찰 수사 맹비판도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통합진보당 상고심에 개입한 의혹을 받는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법원행정처 문건을 읽어 본 적도 없다"며 의혹을 부인했다. 검찰은 통진당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할 지 검토한 법원행정처 문건이 유 전 연구관을 통해 대법에 전달됐다고 보고 있다.
2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재판장 윤종섭) 심리로 열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속행 공판에는 유 전 연구관이 증인으로 나왔다. 그는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마지막으로 판사를 그만 두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유 전 연구관은 2016년 6월 임 전 차장과 공모해 통진당 소송의 전원합의체 회부를 검토한 법원행정처 문건을 대법에 전달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이 소송은 2014년말 헌법재판소 정당해산 결정으로 의원직을 잃은 통진당 의원들이 지위확인 소송을 낸 사건이다. 당시 대법 수뇌부들은 "의원직 상실 여부를 결정할 권한은 법원에 있다"는 점을 못박아야 한다며 각급 재판에 개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항소심에서도 의원직을 회복하지 못한 이석기 전 의원 등의 상고로 사건이 대법에 넘어오자 법원행정처는 '통진당 사건 전합 회부에 관한 의견(대외비)' 문건을 작성했다. 해당 문건의 맨 앞장에는 양승태 대법원의 기조로 파악된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면) 국회의원 직위 상실 여부에 관한 판단 권한이 사법부에 있음을 보다 명징하게 외부에 알릴 수 있음"이라는 문구가 쓰였다.
이 문건은 당시 선임재판연구관 김모 씨를 거쳐 유 전 연구관에게 전달된 것으로 조사됐다.
유 전 연구관은 이 문건을 읽은 기억도 없다며 공소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증언을 했다. 이날 유 전 연구관은 "(문건을 받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며 "의문인 점은, 이 문건 파일에 암호가 설정돼 있는 것 같은데 저는 평소 암호가 있는 문서를 저장하거나 사용한 적 없다. (파일을) 안 열어 봤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암호 설정된 문서는 절대 읽지 않는다는 업무 원칙이 있냐는 검사의 질문엔 "그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중간 전달책으로 조사된 김 전 연구관은 앞서 "문건을 출력해 유 전 연구관에게 대면 보고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하지만 이날 유 전 연구관은 "그런 기억은 없다"고 했다. 해당 문건을 총괄재판연구관에게 전달해 검토하거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보고한 사실이 있냐는 질문에도 각각 "기억에 없다", "보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또 유 전 연구관은 "재판연구관실에서 자체 조사한 결과 제가 이 문건을 전달한 사실은 없는 걸로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통진당 사건의 경우 정당 해산으로 의원 지위가 상실되는 등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사건이라 주목했을 뿐, 다른 이유로 관심을 가진 이는 없었다고도 했다. 유 전 연구관은 "워낙 특수한 사건이라 의원직 상실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법원 직원부터 법조인, 학계와 언론 모두의 관심사였다"며 "대법원장이 관심을 가졌다고 해서 그 자체가 문제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 피고인인 임 전 차장에게 통진당 소송 관련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유 전 연구관은 "임 전 차장과 구내 식당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주례할 일이 있다길래 주례사 샘플을 보내준 적은 있다"면서도 "통진당 행정소송 관련 대화는 이메일로도 나눈 적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날 유 전 연구관은 지난해 6월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을 낸 경위도 설명했다. 그는 "법정 진술은 녹음되기 때문에 뉘앙스와 맥락을 느낄 수 있지만, 검찰 조서는 영상 녹화가 아닌 한 그렇지 않다"며 "공소사실 증명에 편리하도록 여러 차례 추궁해서 질문한 다음 결론만 (조서에) 기재하는 등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한 헌법 소원을 제기한 상태"라고 밝혔다.
유 전 연구관은 자신의 1심 재판에서도 검찰 수사가 부적절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인 박채윤 씨의 재판 관련 문건을 청와대로 유출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항소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1심 재판 과정에서 유 전 연구관 측은 검찰이 2차례나 '포토라인'에 세워 위축시켜 원하는 진술을 이끌어 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유 전 연구관의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는 이러한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다. 검사가 조사에 참여한 변호인의 필기를 제한하고 같은 질문을 거듭 추궁하는 등 고압적 태도를 취해 피의자로서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검찰이 공소사실의 근거로 삼았던 조서의 상당 부분이 유죄 증거로 인정받지 못했다. 재판부는 변호사 개업 과정에서 법원 내부 자료를 빼돌린 혐의(절도·개인정보보호법 위반·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등에도 무죄를 선고했다.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법원의 첫 판단이었다.
이날 신문에서 마지막 발언 기회를 얻은 유 전 연구관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 많은 연구관들이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 먹듯 하며 사심없이 헌신적으로 일했다. 저 또한 25년 근무 기간 중 가장 혼신의 힘을 다한 시기로 기억한다"며 "대법 연구관의 본질적 업무는 보고인데, 이 영역까지 수사 대상이 되고 많은 연구관들이 검찰 조사를 받은 것이 가슴 아프고 통탄스럽다"고 심경을 전했다. 이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고, 이번 진통이 밑거름 돼 국민 신뢰 위에 굳건히 서는 사법부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임 전 차장 사건을 맡은 형사합의36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재확산에도 재판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재판부는 "이 사건은 증인신문 기일을 변경하는 게 쉽지 않다"며 "재판부 모두 마스크를 쓴 채로 재판을 진행하는 점, 법정에 출석하는 인원 수가 한정돼 있는 등의 사정을 고려해 이 사건은 그대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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