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행정권 남용 52회 공판…'부산 법조 비리 의혹' 도마에
[더팩트ㅣ서울중앙지법=장우성 기자] "재판장님. 증인이 증언을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휴정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양승태 전 대법원장 변호인이 말했다. 재판장 뿐 아니라 법정의 모든 사람이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잊었다.
증인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틀어막았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어깨가 가늘게 들썩었다.
휴정을 선포한 재판장과 배석판사는 퇴정했다. 증인은 예를 표시하기 위해 일어섰지만 여전히 고개를 파묻고 손수건을 내리지 못 했다.
윤인태 전 부산고등법원장(현 변호사)는 1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제 52회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양승태 전 원장의 경남고 10년 후배다. 고영한 전 대법관과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2년간 함께 근무했다. 박병대 전 대법관과는 사법연수원 12기 동기로 막역한 사이다.
부산경남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경력 32년 법관이 단순히 세 피고인과 친분이 있어서 법정에 선 것은 물론 아니다. 부산고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요구를 받아 문모 부장판사의 비위 행위를 무마하고, 재판에 개입한 정황을 잘 아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검찰의 몰아붙이는 신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거듭하며 지탱하던 그는 변호인 반대신문이 시작되자 숨통이 트였는지 일거에 무너졌다.
"증인은 법리에 밝으시고 평생 헌신하신 법관이신데 이렇게 검찰 조사에 이어 법정 증인으로 서게 되시어 피고인(박병대 전 대법관) 대신해 대단히 죄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합니다."
가장 친분이 두터운 박병대 전 대법관의 변호인이 말을 마치기 전부터 윤인태 전 원장의 얼굴은 손수건으로 덮였다. 박병대 전 대법관의 표정도 침통했다.
이날 법정에서 가장 많이 이름이 거론된 문모 부장판사는 윤인태 전 원장과 15년간 같은 법원에서 근무했다. 퇴직 후에도 부산지역 한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함께 일한다. 그는 박근혜 정부의 부산 출신 청와대 고위인사와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 전 부장판사는 2015년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게 뇌물을 준 부산 지역 건설사업가 정모 씨에게 골프와 술접대 등 향응을 받은 비위가 포착됐다. 자진 퇴직할 때까지 징계를 받지 않았다. 당시 지휘감독 책임은 윤인태 부산고법원장에게 있었다. 그는 문 부장판사의 의혹을 알고도 '구두경고'하는 데 그쳤다.
2015년 가을, 부산고법원장 집무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이었다.
"박병대 처장이 문 판사가 지역경제인과 골프 운동을 많이 한다고... 그말은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피의자와 술을 먹었다든가...이 말은 확신이 없습니다만, 구두경고를 좀 주라는 취지로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박병대 처장은 당시 대검찰청 고위간부가 법원행정처에 전달한 문건을 받았다. 밀봉된 봉투에 담겨 있었다. 문 부장판사의 향응 등 비위 첩보를 간추린 내용이었다. '정운호 게이트' 등 법관들의 부패 혐의로 사회가 들끓던 때였다. 이 문제까지 알려지면 사법부가 큰 타격을 받을 게 뻔했다. 마침 막역한 윤인태 전 원장의 휘하에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던 셈이다.
윤인태 원장은 박 처장의 말대로 문 부장판사를 원장실로 불러 구두로 경고했다. 비위 의혹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나 감사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판사가 일반인과 공 친 것 자체가 범죄는 아니다. 또 박병대 처장이 법원행정처 차원에서 사실 확인을 한 걸로 받아들였다"라고 조사권을 발동하지 않은 이유를 댔다.
이 사건 뒤 근무평정도 의아했다. 검찰과 법원행정처가 비위 정황을 파악해 구두경고를 받은 문 부장판사에게 최고점을 줬다. 평가란에는 '자질이 우수한 판사로서 상위 보직에 보함이 적정함'이라고 적었다. 윤 전 원장은 "(구두경고한 사실을)깜박해서"라고 했다.
의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2016년 9월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실이 작성한 '문○○ 고법판사 관련사항'이라는 문건에는 문 부장판사가 조현오 전 경찰청장 뇌물 사건에 연루된 건설사업가 정모 씨의 영장이 두번이나 기각되는데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재판 진행 내역과 재판부의 심증을 실시간 외부로 전달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이 문건은 특히 검찰이 문 부장판사의 재판 개입에 불만이 많아 이같은 의혹을 언론에 의도적으로 흘릴 수 있다는 가능성도 우려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양승태 사법부'의 신뢰는 완전히 추락할 상황이었다.
결국 2016년 11월쯤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의 후임인 고영한 처장이 윤인태 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고영한 처장은 당시 진행 중이던 조현오 청장 2심 재판 선고기일을 문 부장판사가 자진 퇴직 예정인 2017년 2월 이후로 미루도록 재판부에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미 변론이 끝나고 선고기일(11월24일)이 잡힌 상태였지만 변론을 재개해 심리를 좀더 충실히 한 뒤 검찰의 불만을 달래 언론에 의혹을 제보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취지였다. 윤인태 원장은 이 재판을 맡은 김모 부장판사에게 고영한 처장의 요청을 전달했다. 실제 이 재판은 돌연 변론을 재개해 기일을 2회 더 진행하고 문 부장판사가 사표를 낸 뒤에 선고가 났다.
"이런 과정이 재판독립 원칙을 침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검사)
"재판 실체 관계에 관여하는 게 아니라 선고의 시기 등 절차적 문제라서 법원장으로서 충분히 이야기할 사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판 공정성에 문제제기가 있다는데 당연히 해야할 조치였습니다."(윤인태)
윤인태 전 원장의 증언은 뭔가 명쾌하지 않았다. 특히 검찰 조사 때 비교적 상세하게 답했던 진술을 대부분 실제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일관했다. 고영한 처장과 통화 내용도 "문 부장이 말이 많으니 말이 안 나오도록 해달라는 정도였다"며 "구체적 워딩은 가물가물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검사가 검찰 조사 때 진술을 번복하는 이유를 캐묻자 "정말 기억이 나지않는데 검찰 조사에 가면 뭐라도 진술은 해야 했다. 마침 언론에 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 관련 문건 기사를 봤다. 이를 참고해 이 정도 선에서 답해야겠다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윤인태 원장이 2016년 11월 법원전산망 '코트넷'에서 조현오 전 청장 재판 기록을 검색한 기록도 들이 밀었다. 갑자기 선고기일이 연기되고 변론을 재개하기로 결정된 직후였다. 검찰은 "(재판부에 요청한 대로)변론이 재개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검색한 것 아니냐"고 따졌지만 그는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날 이규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도 같은 사건을 검색한 기록이 나왔다. 이 위원도 현재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의 핵심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는 중이다.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증인신문이 끝나자 윤인태 전 원장은 법정 중앙을 가로 질러 퇴정했다. 보통 증인은 옆문으로 출입한다. 손수건을 꺼내야 할 만큼 난감했던 법정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일까.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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