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금부터 채용까지'…뇌물 범위 넓어졌지만 법은 '도돌이표'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야심한 시각, 유력 인사에게 은밀히 전달된 사과박스 안을 열면 거액의 돈이 들어 있다. 금액이 적거나 수표일 경우 케이크 상자로 대신하기도 한다. 영화로 재현된 뇌물이 전달되는 상황은 늘 이런 식이다. 실제로 계좌 거래내역이 남지 않아 뇌물공여 및 수수범의 단골 수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뇌물죄 재판을 보면 뇌물 범죄의 양상도 다양화되는 추세다. '다스 의혹'으로 기소돼 장기전을 치르고 있는 이명박(78)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 중 하나는 삼성전자로부터 미국 법무법인 에이킨검프(AKin Gump)의 법률서비스 기회를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채용 비리 의혹의 중심에 선 권성동(59), 김성태(61) 자유한국당 의원 역시 채용 기회를 뇌물로 받았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한국 사법부는 다양한 형태의 뇌물죄로 기소된 사건을 심리 중이지만, 무형의 이익은 금액으로 환산되지 않아 형량을 결정하거나 공소시효를 적용할 때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장학금 뇌물'이 인정되려면
최근 검찰은 조국(54) 전 법무부 장관의 딸 조민(28) 씨가 2016~2018년 부산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노환중 교수의 개인 장학기금에서 6학기 동안 총 1200만 원의 장학금을 받은 사실을 뇌물로 의심한다. 조 전 장관은 딸 조 씨가 장학금을 받은 6학기 중 3학기 동안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공직 생활을 했다. 통상 직계 가족을 경제적 공동체로 보는 사법부 경향과 재산상 이익이 특정된다는 점에서 뇌물죄 적용은 가능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다만 장학금을 뇌물로 인정한 판례를 볼 때 대가성과 지급 절차의 불법성이 면밀히 입증돼야 한다. 2009년 2월 한 수도관 생산업체 대표 김 모 씨는 담당 공무원 자녀에게 장학금 명목으로 뇌물을 건넨 후 중국산 제품을 KS 인증제품인 것처럼 속여 징역3년이 선고된 사례가 있다. 자녀 장학금 형태로 뇌물을 받고 대가를 제공하는 사건은 공무원의 담당 업무가 확실한 만큼 직무관련성 입증이 용이해 '장학금 뇌물'이 인정되는 판례의 공통점이다. 장학금을 받은 자녀의 부모가 자신의 직무 범위 내에서 제공한 대가를 확실히 입증해야 한다는 취지다.
2016년 3월 대법원은 자녀에게 장학생 선정 기회를 제공한 사실 자체만으로 뇌물수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한 바 있다. 유창무 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은 STX재단 간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아들의 장학생 선정을 요청했다. 유 전 사장의 아들 유 모 씨는 심사 중 최종 탈락해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유 전 사장이 불법 청탁을 한 결과 STX재단 측이 해외에서 학교를 졸업한 유 씨를 위한 특별전형을 신설하는 등 의심스러운 정황이 사실로 입증돼 뇌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시했다. 익명을 요청한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조 씨의 아버지 조 전 장관이 정계 인사로 재직해 직무관련성이 짙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러나 장학금을 뇌물로 본 판례를 고려할 때 조 씨가 자격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데도 의심스러운 절차를 통해 장학금을 받았는지를 필히 입증해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기업 정규직'도 뇌물 될까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한창 재판이 진행 중인 김성태 한국당 의원은 KT 비정규직으로 근무던 딸을 정규직으로 채용시키는 형태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이석채(74) 전 KT 회장 등 KT 임직원이 업무방해죄 등으로 기소된 것과 달리 김 의원에게는 뇌물죄가 적용됐다. 딸의 채용을 뇌물로 본 검찰이 무리한 기소를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지만 과거 사례를 종합하면 채용 역시 뇌물죄 적용이 가능하다.
2019년 7월 항소심에서도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김학현(62) 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의 혐의 역시 뇌물수수였다. 지인의 대기업 채용을 강요한 혐의 사실이 사실로 입증돼 함께 기소된 정재찬(63) 전 공정거래위원장과 간부들 역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검찰 항소로 2심 재판절차를 밟고 있는 권성동 한국당 의원 역시 전직 비서관 등을 강원랜드에 채용하도록 청탁한 혐의로 기소됐다. 권 의원의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이순형 부장판사)는 권 의원의 채용 청탁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검찰이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한 것에 별다른 지적은 하지 않았다. 강태근 법률사무소 신록 변호사는 "최근 인사청탁으로 인한 채용이 뇌물죄로 기소되는 경우가 잦은데 이런 경우 채용 기회 자체를 무형의 이익으로 판단한다. 성 접대와 유사한 맥락"이라며 "돈이 오가는 다른 뇌물죄처럼 청탁한 자가 자신의 직무와 관련한 대가를 제공한 사실이 입증될 경우 얼마든지 뇌물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액수로 정해지는 뇌물죄 형량…'돈 없는 뇌물'은?
뇌물 범죄 양상이 다양해짐에 따라 '뇌물없는 뇌물죄'로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도 많다. 지난 5월 검찰은 자동차 부품업체 다스(DAS)의 실 소유주로 있으면서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무형의 뇌물을 예비적 공소사실로 추가했다. 삼성전자가 이 전 대통령 측에 에이킨검프의 법률서비스를 받을 기회를 준 것도 뇌물의 일종이라는 내용이다. 이필우 대한변호사협회 제2기획이사(법무법인 콤파스)는 "뇌물 범죄가 성립하려면 재산상 이익이 반드시 발생해야 하는데, 최근 판례를 보면 무형의 이익도 뇌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통상 무형의 이익이라도 금액으로 추산한 후 양형에 고려한다. 예를 들어 법률서비스는 사건이 발생한 시기 평균 변호사 수임료를 뇌물액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성 접대 행위가 뇌물로 인정된 판례도 있다. 2012년 11월 서울동부지방검찰청에서 실무수습을 하던 검사 전 모 씨는 자신이 맡은 사건의 여성 피의자에게 검사실, 숙박업소 등에서 성 접대를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검사라는 직무상 위력을 이용한 성폭력 사건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뇌물수수 혐의가 적용됐다. 이듬해 전 씨는 뇌물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검사의 성 추문이라는 점, 성범죄 여부 공방이 있었다는 점에서 김학의(63) 전 법무부 차관이 떠오르는 사례기도 하다. 22일 선고를 앞둔 김 전 차관이 받는 혐의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뇌물)에는 2006~2007년 건설업자 윤중천(58) 씨 명의 별장에서 성 접대를 받은 사실도 포함돼 있다. 김 전 차관과 전 씨의 공통점은 또 있는데, 뇌물죄 구성요건인 재산상 이익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뇌물죄 공소시효는 △5000만원 미만 5년 △5000만원 이상~1억 미만 7년 △1억 이상 10년 등 액수별로 차이를 둔다. 김 전 차관이 받는 혐의 역시 액수에 따라 최대 무기징역까지 선고하는 등 뇌물액이 중요한 척도가 된다. 성 접대처럼 금액을 산정하기 어려운 뇌물은 공소시효 적용과 형량을 결정할 별 다른 기준이 없어 재판부 판단에만 의지하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뇌물 범죄가 갈수록 진화하는데 비해 참고할 판례와 법 조항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법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위해 다투는 검사와 변호인의 역량만 믿을 것이 아니라 법리적 근거가 확실히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 출신 이승혜 변호사(변호사 이승혜 법률사무소)는 "사실 무형의 뇌물죄를 판결하는데 고려할 학설이나 판례 등 데이터가 아직 많이 쌓이지 않은 편이다. 이에 따라 다소 들쑥날쑥한 판결이 나오기도 한다"며 "현행법상 금액으로 추산된 뇌물액에 따라 형량과 공소시효 등이 결정되므로 반드시 연구해야할 점"이라고 제언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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