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등 재판 본격화...'공소장일본주의' 앞세워 기싸움
[더팩트ㅣ송은화 기자]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현직 판사들의 재판이 본격화됐다. 이르면 이번달 말부터 피고인 신분으로 본인들의 재판에 직접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초반부터 '공소장 일본주의'를 앞세우며 기싸움에 들어가 앞으로 전개될 법정 공방이 심상치 않다.
20일부터 피고인이 된 현직 판사들이 줄줄이 재판에 들어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유영근 재판장)는 이날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신광렬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 부장판사, 성창호‧조의연 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의 첫 번째 공판준비기일 심리를 진행했다. 공판준비기일은 재판 쟁점 정리 등의 절차를 진행하는 만큼, 피고인의 출석 의무는 없기 때문에 재판에 출석하진 않았다.
세 부장판사는 2016년 이른바 '정운호 게이트' 사태로 불거진 법관 비리 의혹을 축소하기 위해 검찰 수사기록을 법원행정처에 유출한 혐의 등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이날 재판에서 '기관 내 보고이며, 기밀 누설로 볼 수 없다'며 검찰의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특히 "검찰이 공소장 일본주의를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신 부장판사측 변호인은 "(공소사실의) 배경이라는 이유로 사법부 동향 등이 기재되는 등 공소사실이 아닌 검사의 법적 견해, 평가가 기재됐다"고 지적했다. 조 부장판사측 변호인도 "행정처 내부 대응 등은 범죄 사실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공소장 일본주의'는 검찰이 기소할 때 판사에게 범죄사실만이 담긴 공소장을 제출하고, 유죄를 예단하게 하는 서류나 기타 물건을 첨부‧인용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이에 재판부도 "통상적인 공소장과 많이 다르고 힘이 너무 들어갔다"며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 주장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다"고 전제했다.
◆'공소장 일본주의' 입장 피고인 되자 뒤집혀
사법농단 관련 재판에서 피고측 변호인들이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를 주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3월 11일 첫 재판을 시작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공소장에 켜켜이 쌓여있는 검찰발 미세먼지로 형성된 신기루에 매몰되지 말고,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으로 공정하고 충실하게 심리해달라"며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러면서 검찰이 공소장 일본주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기소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역시 2월 26일 자신의 보석 청구를 위한 심문에 참석해 "흡사 조물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검찰이) 300쪽이나 되는 공소장을 만들었다"며 검찰을 향해 작심 비판을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양 전 원장은 어쨌든 자신은 이 공소장에 대응해야 한다고 밝히며 검찰이 공소장에 기록한 범죄사실이 모두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양 전 원장은 10년 전 대법관 법관 시절 밝힌 '공소장 일본주의' 입장을 스스로 뒤집어 '자가당착'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9년 1월 22일 문국현 당시 창조한국당 대표의 상고심 판결에서 "공소장의 특성상 법률이 정한 범위로 공소사실을 한정해 넣긴 어려운 점이 있다"고 판단하고 검찰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당시 대법관이었던 양 전 대법원장은 '범죄사실을 명확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관련 설명을 넣을 수밖에 없고, 이를 어느정도는 용인할 수 밖에 없다는 취지'의 다수 의견에 동의했다.
반면 김영란.박시환.김지형.전수안 대법관은 '공소장 일본주의'는 공정한 재판이라는 대원칙을 강조한 것으로 타협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반대 의견을 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보충의견을 통해 '공소장 일본주의'를 소수의견과 같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경직되게 이해한다면 오히려 형사사법절차를 비효율적,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정의의 실현에 장애가 초래될 것이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피고인이 되자 정반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재판부, 시작 전부터 '긴 여정'에 긴장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는 이날 열린 신광렬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 부장판사, 성창호‧조의연 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의 첫 번째 공판준비기일에서 "(공소장의) 모든 사실을 입증하는 데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지적하며 "기존의 다른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서도 공소장 수정이 이뤄진 것으로 아는데, (이런 식으로 재판을 진행하다간) 관련 재판들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5부 박남천 부장판사도 29일 첫 정식재판을 열기로 했다. 박 부장판사는 "아직 검찰 증거에 대한 변호인 측의 의견이 모두 정리되지 않은데다 양측이 충돌하는 지점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형사소송법 규정에 따라 정식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사건의 공판준비기일 시작 뒤 3개월이 지나면 이를 종결해야 한다. 양 전 대법원장의 공판준비기일은 3월 25일을 시작으로 5월 9일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박 부장판사는 5차례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하면서 증거조사 방식 등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측의 법정 공방이 벌어지면 한숨을 쉬는 등 본 재판 시작도 전에 지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직 판사들 줄줄이..양승태 29일 드디어 법정에
이날(20일) 열린 신 부장판사 등 사건을 시작으로 이른바 ‘사법농단'의 실무자 역할을 한 현직 판사들의 재판도 본격화 된다.
22일에는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 심리로 이태종 당시 서울서부지법원장에 대한 첫 번째 공판준비기일이 열린다. 이 전 서부지법원장은 서울서부지법 집행관 비리 사건이 발생하자 검찰의 수사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법원행정처에 수사 기밀을 전달한 혐의 등을 받는다.
이번 사태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본 재판도 다음주부터 시작된다.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재판도 이날 함께 진행된다.
29일은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 지 125일, 기소된 지 107일 되는 날이다. 그동안 공판준비기일은 정식 재판이 아니어서 피고인들이 직접 출석하지 않았지만 이날부터는 다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3월 보석 심문 기일에 직접 출석한 뒤 두 달여 만에 다시 법정에 선다.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은 지난해 12월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5개월 여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재판부는 검찰이 현재까지 신청한 증인 211명 중 임 전 차장과 이민걸 전 기획조정실장,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 26명을 우선 채택했다. 이에 따라 양 전 원장과 임 전 실장은 조만간 법정에서 만날 것으로 보인다.
◆양승태 구속 기간 8월 11일 만료...임종헌 1차례 구속기간 연장
임종헌 전 차장은 20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 공판에서 법원의 추가 구속 영장 발부가 부적법하다고 주장했다.
임 전 차장은 지난 8일 열린 구속 심문에서 1월 기소 사건과 2월 기소 사건 모두 논의됐지만, 재판부가 1월 기소 사건에 대해서만 영장을 발부했다고 지적했다. 1월 기소 사건에는 임 전 차장이 상고법원 도입 등 사법부 현안 해결에 도움을 받기 위해 서영교.전병헌.이군현. 노철래 등 전.현직 의원들의 재판 민원을 들어줬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앞서 법원은 8일 1심 구속기한 만료(13일)를 앞둔 임 전 차장에 대한 구속 심문을 통해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구속 기간을 연장했다. 이에 따라 임 전 차장은 앞으로 6개월 간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됐다.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 기간도 오는 8월 11일 0시에 만료된다. 이에 따라 구속 기간 내 양 전 원장의 재판 심리를 마무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추가 기소를 하지 않으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happy@tf.co.kr
-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talk.tf.co.kr/bbs/report/write
-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