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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현장]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문 대통령, 2년 전 약속 지켜 달라”

  • 사회 | 2019-05-02 14:52
가습기살균제피해자단체협의회 등이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제금융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우측은 사회를 맡은 김기태 가습기넷 공동운영위원장. /송주원 인턴기자
가습기살균제피해자단체협의회 등이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제금융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우측은 사회를 맡은 김기태 가습기넷 공동운영위원장. /송주원 인턴기자

‘옥시’ 사옥 앞 기자회견…“가족 잃고 길거리 호소 비참하다”

[더팩트ㅣ송주원 인턴기자] 가습기살균제 사건 피해자 고 조덕진 목사가 지난달 25일 사망한 뒤 유족이 정부에 책임자 엄벌과 피해자 보호를 거듭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8월 피해자들을 직접 면담한 자리에서 대책 마련과 진상규명을 약속한 바 있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단체협의회와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는 2일 오전 11시 30분경 서울 영등포구 국제금융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기자회견 장소인 국제금융센터 24층에는 옥시레킷벤키저 사옥이 있다.

점심시간을 앞둔 국제금융센터 앞은 식사를 하러 나온 직장인들로 붐볐다. 거센 바람이 불어 세워둔 배너가 넘어지고 마이크가 없어 발언자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히는 등 열악한 환경이었다. 기자회견도 예정된 시각보다 30여 분 미뤄졌다.

그러나 20여 년 전 갓 태어난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바람소리를 넘어섰다. 피해자 유족 이장수 씨는 딸이 건강하게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출생증명서를 들고 “문제의 가습기는 1994년 개발돼 그 해 가을부터 판매됐다. 우리 가족은 그 다음해 1995년부터 사용했으니 최초 사용자인 셈”이라고 밝혔다. 그는 가습기 앞에서 찍은 아들의 사진을 공개하며 “이처럼 가습기를 매일 사용한 증거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딸의 사망진단서를 내보이며 “정부는 틀림없이 ‘나라는 나라다워야 한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피해자 유족이 기자회견장 뒷편에 마련된 시민분향소에서 영정 앞에 헌화하고 있다. 좌측 아래 두 번째 흑백사진이 고 이의영 양의 영정. /송주원 인턴기자
피해자 유족이 기자회견장 뒷편에 마련된 시민분향소에서 영정 앞에 헌화하고 있다. 좌측 아래 두 번째 흑백사진이 고 이의영 양의 영정. /송주원 인턴기자

이 씨 부부는 1995년 반지하방에서 세 살배기 아들과 생후 50일이 된 딸 고 이의영 양을 키우고 있었다. 반지하 특성상 건조한 공기가 어린 자녀들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 고민하던 중 한 방송인이 출연한 문제의 가습기 광고를 보고 구입해 사용했다. 그러나 고 의영 양은 가습기를 이용한지 얼마 안 돼 누런 콧물이 나오고 입술이 파래진 채 사망했다. 사망진단서에 따르면 사인은 모세기관지염과 흡입성 폐렴, 그리고 이에 따른 바이러스성 심근염이었다. 이 씨는 당시 딸을 진료하던 의료진이 “아기 입술이 왜 이렇게 파랗냐”고 했던 것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25일 아들을 잃은 고 조 목사의 아버지 조오섭 씨는 “2012년 아내가 세상을 떠난데 이어 4월 25일 오후 11시 53분 아들도 눈을 감았다”며 “가습기를 판매한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살균제를) 짐승에도 못 쓸 것이라 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조 씨는 1일 안용찬 애경산업 전 대표의 영장이 기각된 것을 언급하며 “정부와 판사, 기업 모두 짠 것처럼 느껴졌다”며 “더 이상 인간의 생명을 볼모로 대기업의 이윤을 추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조 씨의 부부는 아들인 고 조 목사로부터 해당 가습기를 선물 받아 이용하게 됐다. 고 조 목사 역시 동일한 기종의 가습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아들이 선물해준 가습기를 3년간 이용한 어머니 고 박월복 씨는 2012년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남편 조 씨 역시 천식으로 투병 중이다. 조 씨 가족 모두 마련된 보상체계 중 가장 하위 단계인 특별구제계정으로 인정돼 보상금은 물론 치료비와 장례비도 지원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 조 목사는 피해 신고 당시 환경부로부터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 가능성 거의 없음(4단계)'이라고 판정받았다.

가습기 살균제는 한 가장의 목숨도 앗아갔다. 이 사태로 남편을 잃은 김태윤 씨는 “교통사고가 나도 가해자가 찾아와 용서를 구하고 합의점을 찾는 등 해결하려 노력하는데 이 나라는 1403명이 죽도록 가해 기업에 책임조차 묻지 못 한다”며 “우리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존중하는 정의로운 정부일 줄 알았는데 지금은 세금을 내며 이 나라에 살아야 할지 의문이다”라고 눈물을 삼켰다. 김 씨는 “대통령님, 제발 잘못한 기업에게 벌을 내려달라. 길거리에서 이렇게 호소하는 것도 이제는 비참하고 비굴하다”고 호소했다.

조순미 천식인정자권리찾기 대표가 호흡 보조기구를 착용한 해 발언하고 있다. 조 대표는 2017년 8월 청와대 인왕실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의 면담에도 직접 참석한 바 있다. /송주원 인턴기자
조순미 천식인정자권리찾기 대표가 호흡 보조기구를 착용한 해 발언하고 있다. 조 대표는 2017년 8월 청와대 인왕실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의 면담에도 직접 참석한 바 있다. /송주원 인턴기자

조순미 천식인정자권리찾기 대표는 호흡을 도와주는 보조기구를 착용한 채 “살균제에 있는 이 독성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사용된 전례가 없는데도 우리나라는 허가했다. 정부는 물론 제작자 SK케미칼, 판매한 옥시(옥시레킷벤키저), 애경산업, 그리고 이마트, 홈플러스 등의 기업은 지금까지 책임을 피하고 있다”고 했다. 조 대표는 “문 대통령이 취임한 해 8월 피해자 15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사과하며 ‘어느 누구도 억울하기 않게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하신 걸 분명히 기억한다”며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해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다시 한 번 그 약속을 지켜주길 간곡히 부탁한다”고 했다.

이들은 이날부터 옥시 사옥 앞에서 무기한 농성을 시작하며 정부 접수 기준 사망자 1403명 전원에 대한 시민분향소를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연다고 밝혔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SK케미칼(당시 유공)이 1994년 최초로 출시한 이후 가습기살균제에 따른 폐손상이 사인으로 추정되는 잇단 사망 사건이다. 폐질환으로 임산부 환자가 연달아 숨진 것을 의심한 한 대학병원이 질병관리본부에 신고하며 2011년 4월부터 조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조사결과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 인산염과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이라는 독성이 확인됐다.

피해자들은 지난해 11월 제작‧유통 기업인 SK·애경을 고발했다. 이에 따라 홍지호 SK케미칼 전 대표와 애경산업의 안 전 대표 등이 구속됐으나 안 전 대표는 1일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법원은 “SK케미칼이 원료물질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주지 않아 유해성을 인지하기 어려웠다”는 안 전 대표의 진술을 인정하고 영장을 기각했다. 함께 구속된 이마트 전 임원 홍 모 씨 역시 풀려났다.

ilraoh_@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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