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구 배병철기자] "밀크 멤버였다는 말만 들으면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지만 SM출신이라는 건 아직도 뿌듯해요."

지난 6월 인디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감독 윤성호)를 통해 연기자로 변신한 박희본의 첫마디다. 박희본은 원래 박재영이란 이름으로 2002년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걸그룹 밀크의 멤버였다. 인터넷에서 밀크를 검색해 보면 누군가 '비운의 댄스그룹'이란 달갑지 않은 수식어를 붙여놨다.

아직 20대의 펄떡펄떡한 청춘이건만 화려한 아이돌 스타에서 냉정한 현실 속의 배우로 돌아온 박희본은 마치 인생을 달관한듯한 어투가 강렬한 인상을 줬다. 도대체 그에겐 그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2002년 월드컵 때 인생에서 가장 바쁜 한때를 보냈다. 하얀색 옷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내가 나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척 재미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학교에 간건데 여기저기서 '밀크! 밀크!'하며 수근댔다.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누군가 '밀크가 왜 학교에 버스타고 다녀요?'라고 대놓고 묻기도 했다. 너무 부끄러워서 학교가 세종대였는데 그곳까지 못가고 화양리 쯤에서 내린 적도 있었다."

이때 얻은 뼈아픈 교훈이 있다고 박희본은 말한다. 반항적인 생각이 무수하게 든 것도 사실이지만 결코 겉멋 든 연예인이 돼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멤버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밀크 해체의 결정타가 됐던 멤버는 미국에서 다시 한국에 들어와 학교를 다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박희본 자신을 비롯해서 나머지 두 멤버는 아직도 연예계에서 일하고 있다. 보미는 작곡 실력까지 갖춰 앨범을 준비하고 있고 서현진은 구혜선이 감독을 맡은 영화 '요술'에 출연했다. 밀크 활동을 그만둔 뒤 박희본의 생활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하다.

스스로 아르바이트 백과사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잡다한 일을 경험했다고 한다. 연예활동 때문에 19살 때부터 숙소생활을 해온 탓에 독립적으로 살아야만 했다. 등록금도 스스로 벌어야 했다.

"연예인이 내길이 아니라고 판단한 적도 있었다. 차라리 취업을 하자고 마음먹고 편입준비를 하기도 했다. 명동성당에서 장애우 주일학교 교사를 한 뒤 특수아동 심리상담같은 걸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공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방황 속에서도 박희본은 열심히 산다는 기본을 잃지 않았다. 매달 토익시험을 봐서 900점 이상의 성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전국을 여행하기도 하고 승마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연예인의 껍질을 벗고 보통사람들처럼 편안해졌다. 마침 그때 윤성호 감독에게 연락이 왔고 대본을 한번 읽으며 오디션을 봤다. 윤 감독은 '지금 말투와 행동 그대로 보여주면 되겠다'며 재미있는 작품이니 함께 하자고 했다.

밀크 박재영이 연기자 박희본이 되는 순간이었다. "난 대책없는 낙천주의자였던 것 같다. 잘되겠지, 언젠간 기회가 오겠지 그런 식이었다. 어릴 때부터 소속사에 의존하다보니 기회를 스스로 찾는 법을 잘 몰랐다. 하지만 '할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촬영하면서부터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박희본은 횟수로 따지면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이젠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가겠다고 말한다. 연기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돼야만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요즘 정상의 걸그룹들을 보면 박희본은 옛날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특히 소녀시대 멤버들의 경우 어려운 시절 연습생 시절 동고동락 했던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몸빼바지 입고 쌩얼에 망가지는 모습들 보면 걸그룹 멤버들도 옛날이랑은 확실히 많이 다른 것 같다. 내가 활동할 땐 무조건 귀엽고 예쁘고만 강조했었다."

소녀시대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함께 찍은 옛날 사진이라도 공개해 달라고 하자 박희본은 두손을 흔들었다. 과거는 과거일뿐이고 혹시라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박희본은 일찍이 승마를 배워둔 덕에 김태희가 출연하는 영화 '그랑프리'에도 캐스팅됐다.

김태희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긴 머리도 싹뚝 잘라버렸다. 오디션 때 머리가 긴 이미지가 김태희와 비슷해 보인다는 지적에 '삭발도 할 수 있다'고 당차게 말했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박희본은 여자 최초의 기수 이신영 씨를 롤 모델로 연기변신을 시도했다.

박희본은 연예계 그 누구보다 혹독하고 오랜 신고식을 치뤘다. 그리고 이젠 연기를 평생직업으로 생각한다. 밀크의 박재영은 추억 속에 남아있겠지만 연기자 박희본은 새롭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다. "트위터도 하고 미니홈피도 열심히 하고 있다. 나를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번의 기회라도 더 온다고 믿는다.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격려는 늘 큰 힘이되고 언제나 환영한다."

<사진=김용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