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반복이 아니라 자신만의 '색' 유지 위해 노력

[더팩트ㅣ최현정 기자] 짧은 러닝타임과 빠른 전개가 익숙해진 음악 시장에서 가수 박재정이 정반대의 행보를 선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박재정은 9월 29일 새 미니앨범 '기록 (上)'을 각 음악 사이트에 발매했다. 박재정이 첫 정규 앨범 'Alone(얼론)' 이후 약 3년 반 만에 선보인 이 앨범에는 타이틀곡 '계절의 끝'을 비롯해 '미련', '준비', '고연(枯戀)', '왜'의 5곡과 2개의 인스트루멘털 트랙까지 총 7개 트랙이 수록됐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러닝타임이다. '기록 (上)'의 타이틀곡 '계절의 끝'은 5분 26초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며, '미련'은 5분 15초, '준비'는 4분 47초, '고연(枯戀)'은 4분 41초, '왜'는 3분 26초의 러닝타임을 보여준다.
2개의 인스트루멘털 트랙을 제외하고도 이 5개 트랙의 전체 러닝타임은 약 23분 35초에 달하며, 이는 최근 발매되는 K팝 그룹의 정규앨범 러닝타임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 나지 않거나 오히려 더 긴 수준이다.
박재정이 이처럼 긴 러닝타임의 곡을 녹음한 이유는 명확하다. 곡의 기승전결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한 선택이다.
일례로 앨범 타이틀곡 '계절의 끝'은 빠르게 핵심으로 진입하기보다 감정이 서서히 쌓이고 고조되는 과정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풀어내는 전개를 들려준다.
여기에 박재정도 직접 작성한 앨범 소개글에 "유행에 맞지 않더라도 기승전결을 드라마틱하게 다 담아보고 싶어서 준비했다"라고 적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같은 '긴 러닝타임'은 단순히 '박재정의 고집'으로 치부하기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박재정은 이미 '다른 선택'으로 자신의 대표곡을 만들어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2023년 4월 발표한 첫 정규앨범 'ALONE'의 타이틀곡 '헤어지자 말해요'는 4분 3초다. '계절의 끝'과 비교하면 1분 이상 짧지만 당시 박재정은 이 곡을 만들면서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장의 흐름을 의식했다.
박재정은 '헤어지자 말해요' 발매 당시 이 곡을 "첫 정규 앨범 수록곡 9곡을 먼저 만든 뒤 '사람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마지막에 추가한 곡"이라고 소개하며 "곡 길이가 짧아지는 추세에 맞춰 인트로를 없애고 키를 두 단계 높이는 등 '전략적으로' 곡을 완성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자 말해요'를 '다른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배경에는 '발라드라는 확고한 중심'이 존재한다. 박재정은 시장의 문법을 일부 받아들였지만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발라드라는 축은 그대로 유지했다.
박재정이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유행을 무조건 좇지도, 무조건 외면하지도 않는다. 필요한 순간에는 시장의 문법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표현하려는 음악에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그 문법에서 벗어난다. 그 결과물이 '헤어지자 말해요'와 '계절의 끝'이다.
요약하자면 박재정의 '유행에 벗어난 긴 러닝타임'과 '대중성을 고려한 전략적 접근'은 모두 '발라드라는 자신의 중심'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심'을 유지하려는 박재정의 노력은 '기록(上)'의 다른 곡들을 살펴보면 더 선명해진다. '미련'은 11년 전 만들었던 곡을 2026년의 목소리와 새로운 편곡으로 다시 녹음했으며 '준비'는 일본 프로듀서 토미타 케이이치와 2021년 작업을 시작해 약 5년에 걸쳐 완성했다.
색다른 시도도 포착된다. '고연(枯戀)'은 일반적인 대중가요와 달리 후렴 없는 4절로 구성했으며, 마지막 곡 '왜'는 박재정에게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던 빠른 템포의 애시드 재즈를 들려준다.
이렇듯 '기록(上)'에는 '발라드라는 큰 틀과 중심'은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지를 계속 넓히려는 박재정의 노력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 노력이 더욱 대단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기록(上)'이 '헤어지자 말해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앨범이기 때문이다.
'헤어지자 말해요'는 각종 음악 차트 상위권을 석권한 것은 물론 2023년 TJ미디어 노래방 결산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 1위에 올랐을 만큼 사람들에게 익숙한 곡이다.

때문에 컴백을 앞둔 박재정에게 가장 손쉬운 선택은 '헤어지자 말해요'와 유사한 곡을 한 번 더 발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재정은 '헤어지자 말해요'의 작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새로운 형식과 음악색을 지닌 곡을 앨범에 눌러 담았다.
같은 음악을 반복하는 것과 자신의 색을 지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박재정은 익숙한 장르 안에서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늘려가며 '박재정만의 영역'을 차츰 넓히고 있다. 동시에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소비하는 방식을 살피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13년 차 박재정이 보여주는 '발라드 가수가 살아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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