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여유로움→섬세한 감정 표현까지 소화

[더팩트ㅣ최수빈 기자] 배우 지성이 '아파트'에서 가장 잘하는 연기로 다시 한번 존재감을 증명했다.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부터 묵직한 카리스마, 섬세한 감정 표현까지 자유자재로 오가며 복잡한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완성했다. 익숙한 무기를 능숙하게 꺼내 든 지성은 또 하나의 '지성다운' 캐릭터를 완성했다.
지성이 지난달 11일 첫 방송한 JTBC 토일드라마 '아파트'(극본 김윤영, 연출 조용원)로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다. 작품은 아파트 속 숨겨진 돈을 접수하기 위해 입대의회장 선거에 출마한 오아시스파 전직 보스 박해강(지성 분)이 주민들과 함께 비리를 타파해 나가는 이야기다. 총 12부작으로 현재 9회까지 방송됐다.
작품은 강남에서 사설 도박장 HK무역을 기업처럼 운영하던 대표 박해강이 아버지 같은 존재인 박용만(정진영 분)을 구치소에서 꺼내기 위해 새로운 판에 뛰어드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박용만을 빼내기 위해 박해강에게 필요한 돈은 무려 100억 원. 동생들과 묵혀둔 미수금을 받아내고 살던 집까지 처분하지만 액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급기야 과거 자신이 뿌린 축의금을 회수하겠다며 가짜 결혼식까지 기획한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돈을 마련하지 못하던 박해강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거액의 장기수선충당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손에 넣기 위해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자리를 노린다.
이를 위해 역할 대행 경험이 있는 강하리(하윤경 분)와 1억 원짜리 위장 계약을 맺고 과거 조직원들까지 불러 모아 '가짜 가족'을 꾸린다. 선거 과정에서 과거 폭력 조직 보스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악의적으로 편집된 영상까지 퍼지며 위기를 맞지만 결국 주민들의 마음을 돌려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에 당선된다.
그러나 어렵게 손을 넣었다고 생각한 장기수선충당금 178억 원은 이미 누군가 빼돌린 뒤였다. 박해강은 돈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아파트를 둘러싼 거대한 비리와 마주하고 자신이 처음 세웠던 계획과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설정만 놓고 보면 박해강은 결코 선한 인물은 아니다. 과거 조직을 이끌었던 전직 보스인 데다 처음부터 주민들을 돕겠다는 정의로운 목적을 갖고 아파트에 들어온 것도 아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짜 가족을 만들고 주민들을 속이며 회장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심지어 그가 노리는 것은 주민들이 오랜 시간 모아온 거액의 돈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박해강을 응원하게 된다. 그가 벌이는 일의 시작과 끝에는 결국 자신의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성은 이런 박해강의 아이러니함을 억지로 미화하기보다는 인물이 지닌 인간적인 온도를 차곡차곡 쌓으며 시청자가 자연스럽게 박해강의 서사를 따라가게 만든다.
그 시작은 박해강 특유의 능청스러움이다. 과거 조직을 이끈 보스라고 하면 흔히 거칠고 위압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지성이 그려내는 박해강은 훨씬 부드럽고 친근하다. 박용만과 있을 때는 장난을 치고 웃으며 영락없는 평범한 사람처럼 굴고 조직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딘가 허술하고 귀여운 모습까지 드러낸다.
특히 과장된 상황을 받아내는 지성의 코믹 연기가 빛을 발한다. 강하리와 가짜 부부로 지내면서 벌이는 티키타카 역시 박해강의 능청스럽고 여유로운 면모를 극대화한다. 지성은 진지함과 능청스러움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며 박해강 특유의 유쾌한 매력을 살린다. 덕분에 범죄와 비리를 다루는 작품임에도 분위기가 필요 이상으로 무겁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렇다고 박해강이 가벼운 인물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웃고 장난치던 얼굴로 사람을 대하다가도 일이 얽히는 순간 분위기는 단번에 뒤바뀐다. 지성은 마치 얼굴을 갈아 끼운 듯 표정과 눈빛의 온도를 바꿔 극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한다.
이는 조직 보스 시절 과거의 장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인천 하수구파를 잡던 시절을 떠올리며 몸싸움을 벌일 때 지성은 앞서 보여준 친근한 박해강을 잠시 지운다. 여유 있는 말투와 태도는 그대로인데 그 안에 서늘한 위압감이 더해지며 오아시스파를 이끌었던 과거를 단번에 납득시킨다.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된 뒤에는 또 다른 얼굴을 꺼낸다. 주민들 앞에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작전을 짤 때는 다시 묵직한 카리스마를 드러낸다. 같은 회차 안에서도 능청스러운 가장, 어딘가 허술한 조직 보스, 친근한 입대의 회장, 냉정한 전략가의 모습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서로 따로 놀지 않는다. 지성이 박해강이라는 인물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때문이다.

감정 연기에서는 이러한 장점이 더욱 선명해진다. 강하리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자 박해강은 "실패하면 안 되냐"고 담담하게 위로한다. 이전까지 끊임없이 티격태격했던 두 사람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분위기가 차분하게 내려앉는다. 지성은 과도하게 힘을 주지 않은 말투와 눈빛으로 박해강이 본래 가지고 있던 따뜻함을 표현했다.
박용만이 췌장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박해강의 감정 표현은 더욱 섬세해진다. 자신이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정작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박해강은 흔들린다. 특히 그동안 가족처럼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무너질 듯한 감정을 애써 붙잡는 모습에서 지성은 눈물을 쏟아내기보다 참아내다 터지는 쪽을 택한다.
반대로 박용만의 병보석을 두고 100억 원을 요구하는 청장 앞에서는 눌러왔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웃으며 여유를 부리다가도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상대를 몰아붙인다. 분노와 절박함, 그럼에도 상대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박해강 특유의 여유로움이 짧은 순간 안에 겹쳐진다.
'아파트'에서 지성은 한 인물 안에 공존하기 어려운 얼굴을 자연스럽게 엮어야 했다. 코미디에서는 한없이 망가지다가도 액션에서는 순식간에 분위기를 장악하고 자신의 사람들을 챙기는 강한 책임감과 따뜻한 면모도 표현해야 했다. 그 변화가 잦음에도 박해강이라는 캐릭터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덕분에 '아파트' 역시 단순한 범죄극에 머무르지 않는다. 전직 조직 보스가 주민들의 돈을 노리고 아파트에 잠입한다는 설정은 충분히 거칠고 무거울 수 있지만 지성은 박해강의 여유와 유머, 사람을 향한 애정과 따뜻함을 끊임없이 풀어내 작품에 숨 쉴 틈을 만든다. 그렇다고 너무 가벼워지지 않도록 섬세한 완급 조절을 해낸다.
이처럼 지성은 '아파트'에서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다시 한번 가장 잘 해내고 있다. 종영까지 4회만을 남긴 가운데, 지성이 남은 회차에서 어떤 모습으로 또 한 번 '믿고 보는 배우'의 수식어를 증명할지 이목이 집중된다.
'아파트'는 매주 토요일 오후 10시 40분, 일요일 오후 10시 30분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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