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과 경력에 갇히지 않은 '좋은 어른'의 표본

[더팩트ㅣ김샛별 기자] "배웠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배우 최민식은 '맨 끝줄 소년'을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해부한 작품이라고 정의했다. 후배 배우 최현욱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철저히 흔들리는 허문오를 연기한 그는 "열패감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민낯을 발가벗겨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민식은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맨 끝줄 소년'(극본 장명우, 연출 김규태) 공개 기념 인터뷰를 진행했다. 극 중 국문학과 교수 허문오 역을 맡은 그는 작품과 캐릭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동명의 스페인 희곡을 원작으로 한 '맨 끝줄 소년'은 20년째 신작을 내지 못한 실패한 작가이자 국문학과 교수 허문오가 강의실 맨 끝줄에 앉은 학생 이강(최현욱 분)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의 글에 점차 집착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서스펜스 드라마다. 지난달 25일 전 세계에 6부작 전편 공개됐다.
최민식은 작품이 예상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것에 안도했다. 여름 시장에는 통쾌한 액션물이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맨 끝줄 소년' 같은 묵직한 심리극이 얼마나 받아들여질지 걱정도 컸다. 하지만 작품이 가진 힘은 그의 우려를 보기 좋게 빗나갔다. 최민식은 "솔직히 처음에는 기대를 안 했다. 아무래도 여름이기도 하니 시원하게 악당 응징하는 작품들을 보고 싶지 않나. 반면 이 작품은 답답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때문에 과연 좋아해 주실까 싶었는데, 작품이 가진 힘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원작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희곡이나 영화는 의도적으로 보지 않았다. 자칫 기존 이미지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대신 김규태 감독과 각색된 대본을 믿었다. 그는 대본을 단숨에 읽고 곧바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희곡을 그대로 가져왔다면 창작자의 윤리만 이야기하는 작품이 됐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한국적인 정서와 서스펜스를 입혔어요. 입으로 지은 업, 결국 말 한마디 때문에 무너지는 인간을 보여주는 각색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최민식이 주목한 것은 '허문오'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바라본 건 허문오를 무너뜨린 인간의 본성이었다. 오래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 하나가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 글이 누군가를 구원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끝까지 붙들었다.
그는 "배웠다고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지식인이라고 해서 인격이 완성된 사람은 아니"라며 "열패감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허문오도 이강도 모두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결국 말과 글이 얼마나 큰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작품의 핵심을 짚었다.
허문오는 결코 악인이기만 한 인물은 아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예술가적 열망도 있었지만, 친구 김수훈(허준호 분)을 향한 열등감과 질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최민식은 이 모순적인 면모를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험지를 훔쳐 달아나며 아이처럼 기뻐하는 장면도, 사소한 일탈에 짜릿함을 느끼는 모습도 그래서 만들어졌다. 그는 "허문오는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너무 취약하고 나약한 인간"이라며 "블랙코미디적인 결을 입혀야 오히려 더 안쓰럽고 현실적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허문오가 흔들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강이었다. 작품의 긴장감 역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오디션을 통해 처음 최현욱을 만난 순간부터 최민식은 확신을 가졌다. 그는 "현욱이를 보면서 '리시브만 잘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작품 안에서도 판은 이강이 다 깔아놓지 않나. 난 그 안에서 휘둘리는 사람이니까 현욱이가 깔아 놓는 판에서 몰입하면 되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마주한 최현욱은 기대 이상이었다. 감독의 디렉션을 빠르게 이해했고, 표현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최민식은 "말귀를 정말 잘 알아듣는다"며 "고민한 흔적이 연기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오히려 '내가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 "배우는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작품을 얼마나 이해하고 어떤 목표를 갖고 표현하느냐가 중요하다"며 "현욱이는 그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런 후배를 만난 건 배우로서 큰 복"이라고 치켜세웠다.
오랜 인연을 이어온 허준호와의 호흡은 말 그대로 '척하면 척'이었다. 군 생활까지 함께한 두 사람은 리허설 몇 번만으로도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췄다. 최민식은 "준호와는 서로 설명이 필요 없다. 눈빛만 봐도 안다"며 웃었다.
6부작이라는 짧은 호흡 역시 작품의 장점이었다. 그는 "빌드업을 위해 일부러 무언가를 더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며 "이번 작품만큼 대본을 그대로 믿고 연기한 적도 드물다"고 말했다. 원작의 힘과 한국적으로 재해석된 허문오의 서사가 이미 충분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다는 믿음이었다.
특히 마지막 엔딩은 지금도 여운으로 남는다. 모든 것을 잃은 허문오 앞에 다시 나타난 이강. "다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는 말은 허문오에게 또 다른 유혹이자 구원처럼 다가온다. 최민식은 그 장면을 준비하며 참치캔과 소주를 직접 소품으로 제안할 만큼 허문오의 처지를 세밀하게 고민했다.
"이야기를 쓰는 건 허문오에게 평생의 한이자 중독이었어요. 모든 걸 잃어도 결국 또 글 앞에 앉는 사람이죠."

그가 가장 인상 깊게 꼽은 대사는 의외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극 중 김수훈이 건네는 "쓸 이야기가 없으면 안 써도 되지 않나"라는 한마디였다. 최민식은 "창작자에게는 굉장히 섬뜩한 말"이라며 "그 대사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데뷔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후배들에게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일까. 최민식의 욕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더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고, 더 깊이 인간을 들여다보고 싶다. 화려한 장르보다 사람의 내면을 끝까지 파고드는 이야기에 여전히 끌린다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소를 지었다.
"욕망은 아직도 끓어요. 사람을 탐구하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싶습니다. 결국 배우는 사람을 이해하는 일을 하는 직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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