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성확인서 제도화해야"…방송법 손질 필요성 다시 제기

[더팩트ㅣ강일홍 기자] JTBC가 당초 5월 방영을 목표로 추진하던 리얼리티 예능 '히말라야에서 기원하다'는 2026 북중미 월드컵 한국 축구대표팀의 '8강 진출 기원' 취지의 프로그램입니다. 외주 제작사 비전Q프로덕션이 전 축구 국가대표 이동국, 배우 예지원과 정유미, 개그맨 김병만 등을 원정대원으로 선발하고, 이들과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월드컵 성공기원 프로젝트로 기획됐습니다.
하지만 방송 제작 현장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프로그램 소개 및 원정대 발대식이 시작된 지 불과 30분 만에 행사가 중단됐습니다. 취재진 수십 명이 현장에 모여 있고, 출연진이 무대에 올라 포토타임까지 진행된 뒤였지만 기자회견은 결국 열리지 못했습니다. 이 초유의 사태에 행사장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취재진은 황당한 표정으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원인과 결과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프로젝트 제작을 맡은 외주 제작사 비전Q프로덕션은 JTBC 측의 돌연한 태도 변화가 사태의 발단이라고 주장합니다. 제작사 측에 따르면 애초 JTBC가 5월 방영을 목표로 편성 의향을 밝히며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제작 준비 역시 그 전제를 바탕으로 진행됐습니다.

◆ 계약·항공권·비자까지 진행된 상황…외주 제작사만 '독박'
문제는 발대식 직전 방송사 측이 출연진 교체 요구를 했다는 점인데요. 제작사 측은 "JTBC측으로부터 지금 출연진으로는 광고가 붙지 않으니 출연자를 전면 교체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면서 "이미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들과 출연 계약까지 모두 마친 상태에서 중도 교체는 시간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불가능했던 상황"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제작 준비는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해외 촬영을 위한 항공권과 숙소 예약은 물론 여권과 비자 절차도 마무리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출연진을 교체하라는 요구는 사실상 제작을 중단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제작사 측의 입장입니다.
비전Q프로덕션은 또 다른 문제도 제기합니다. 방송 중계권 구조와 관련된 부분인데요. 제작사 측은 "JTBC가 월드컵을 독점 중계하면서 다른 방송사들은 '월드컵'이라는 단어를 프로그램에 쓰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이 때문에 제작을 하더라도 방송할 곳이 제한돼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JTBC의 입장은 다릅니다. JTBC 측은 "해당 프로그램은 JTBC와 전혀 무관한 프로그램"이라며 선을 긋고 있습니다. JTBC는 또 "JTBC가 먼저 찾아가 제작을 요청했다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르다"며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단순히 편성 검토 요청을 받았고 이를 거절했을 뿐이라는 설명입니다.

◆ JTBC 측 "해당 프로그램은 JTBC와 전혀 무관한 프로그램"
그러나 이번 사태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한 프로젝트의 진실 공방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편성의향서'라는 방송 제작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인데요. 외주 제작사는 통상 방송사가 보내온 편성의향서를 근거로 제작 준비에 착수합니다. 하지만 이 문서는 말 그대로 '의향'일 뿐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정식 계약이 아니기 때문이죠. 즉 방송사가 마음을 바꾸면 언제든지 편성 계획을 철회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제작 현장의 현실입니다. 해외 촬영 프로젝트나 대형 예능은 사전 준비 기간을 매우 길게 잡아야합니다. 동시에 출연진 계약, 촬영 일정 조율, 장비 준비, 장소 섭외 등 막대한 비용이 선투입됩니다. 하지만 편성의향서만 믿고 진행하다가 방송사가 도중에 발을 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외주 제작사가 떠안는 구조입니다.
이 때문에 방송 제작 현장에서는 오랫동안 '편성 갑질' 논란이 반복돼 왔습니다. 전파권을 가진 방송사는 사실상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방송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죠. 반면 외주 제작사는 제작비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을'의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 해외 촬영 위해 스케줄 비운 연예인·스포츠인도 피해자
이번 '히말라야 원정대' 파행 역시 이런 힘의 불균형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더욱이 JTBC는 2026 북중미 월드컵과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을 비롯해 2032년까지 열리는 올림픽과 월드컵 중계권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의 독점 중계권을 쥔 방송사의 영향력은 그만큼 막강합니다.
콘텐츠 시장에서 방송사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제작 생태계의 균형 문제 역시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편성의향서가 아니라 '편성 확인서'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정 단계 이상 제작이 진행된 경우 방송사가 편성을 보장하거나, 취소할 경우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방송법 차원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적지 않습니다. 외주 제작 의무 편성 제도가 존재하지만 실제 제작 현장에서는 여전히 불합리한 구조가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방송사가 프로그램의 완성도나 시장성을 판단해 편성을 조정할 권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이 책임과 균형 없이 행사된다면 결국 피해는 제작 현장과 창작 생태계로 돌아갑니다.
발대식이 30분 만에 중단된 이번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방송 제작 현장의 불균형한 권력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갈등 배경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 분명한 한 가지는 있습니다. 지금의 방송 제작 구조에서 외주 제작사는 여전히 불안정한 줄 위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줄의 한쪽 끝은 여전히 방송사가 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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