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현되지 못한 정의를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반추하고 싶었죠"

[더팩트|박지윤 기자] 장항준 감독이 승자의 기록이 아닌 그 이면을 조명하면서 그럼에도 잊혀서는 안 될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신선하면서도 색다르게 그리며 관객들을 먹먹하게 만들 '왕과 사는 남자'다.
장 감독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개봉을 앞둔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카페에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시사회 후 호평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기자와 만난 그는 "반응이 안 좋으면 몇 년의 농사를 망치는 거고 저를 믿어준 배우와 스태프들, 투자자들에게 죄송한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경거망동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소감을 전하며 작품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다.
오는 2월 4일 스크린에 걸리는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첫 사극에 도전한 장항준 감독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적 없는 단종이 궁을 떠나 영월 산골 마을 청령포로 유배길에 오르는 과정을 스크린에 펼쳐내면서 한국 영화 최초로 단종의 숨겨진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살인의 역사가 드라마틱하니까 계유정난 때를 많이 다루는데 이미 이를 담은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굳이 재생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이후 단종의 삶을 그려보기로 했죠. 단종의 최후 기록이 별로 없어요. 단 몇 줄을 보고 작가님이 재구성한 걸 또 첨삭하면서 실현되지 못한 정의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혀져도 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악당을 보고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이를 엄흥도의 시선에서 바라본 유배 이후 단종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죠."

단종과 함께 이야기의 중심축이 되는 엄흥도는 산골 마을의 촌장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선왕 이홍위(박지훈 분)가 마을로 오게 되자 유배지를 관리하는 보수주인으로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도 점차 마음을 열며 변화하게 되는 인물이다.
이는 실록에 적힌 '노산군이 돌아가셨을 때 엄흥도가 슬퍼하며 곡을 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숨어 살았다'라는 단 두 줄에 장항준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을 덧입혀 탄생된 캐릭터다. 이와 관련해 그는 "왕족보다 더 훌륭한 일을 했는데 힘에 의해 외면당했다. 이걸 지키는 사람의 시선에서 단종의 마지막을 보면 좋을 것 같았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엄흥도는 물론 단종도 중요했어요. 가치 있고 좋은 성군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더라고요. 단종이 왕위에서 밀려난건 절대 나약해서가 아니에요. 어린아이를 지켜줄 사람이 없으니까 왕위에서 밀려난건데 결과적으로 나약하다고 단정 지은 거죠. 사료를 보면 영특하고 학문적인 성취가 좋았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적통 중의 적통이고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지키고 싶은 소년왕이라고 생각했어요. 논픽션이든 픽션이든 왜 이야기를 해야되는지의 가치가 없었다면 영화가 완성되지 못했을 거예요."
역사가 곧 스포인 작품이고 단종의 비극적인 서사를 다루는 만큼 자칫 무겁고 뻔하게만 흘러갈 수도 있었지만, 엄흥도를 유쾌함과 진중함을 오가는 캐릭터로 설정하면서 변주를 준 장항준 감독이다.
"엄흥도로부터 발생하는 코미디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세속적이고 욕심도 있으면서 어느 정도 인간적인 인물이 이홍위를 만나면서 변화하잖아요. 이홍위도 용기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요. 저는 어떤 영화에서든 성장하지 않는 인물은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앞서 '왕과 사는 남자'는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전미도 김민 등으로 신선하면서도 탄탄한 캐스팅 라인업을 구축해 대중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믿고 보는 연기로 캐릭터를 완벽 소화하고 새로운 앙상블도 형성하며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여기에 안재홍 박지환 이준혁 장현성 정진운 등도 짧고 굵게 힘을 보태며 극의 몰입도를 한껏 끌어올린다.
이에 '인복이 많은 것 같다'는 기자의 말을 들은 장 감독은 "반대로 생각하면 이걸 누가 모았나. 완성본을 보니까 지금 배우들이 딱 맞는 것 같지만 10명의 감독에게 캐스팅하라고 하면 다를 것이다. 나는 인기를 제외하고 온전히 연기만 봤다"면서 각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를 설명했다.
"유해진은 너무 오래된 친구고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자연스럽게 제 머릿속에 있었어요. 흔히 국사책을 찢고 나왔다고 하는데 저도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한명회는 전형적인 인물인데 때로는 전형성이 필요해요. 당대 기록을 보니까 키가 크고 얼굴이 훤해서 모두가 우러러봤고 기골이 장대했다더라고요. 이걸 보고 떠오른 사람은 유지태뿐이었어요. 매화는 비중이 크지 않았는데 그 나이대에 연기 잘하고 신선한 사람으로 전미도가 생각났어요. 당연히 안 할 걸 알고 시나리오를 드렸는데 하겠다더라고요. 그래서 만들면서 분량이 늘어났죠."
"엄흥도의 아들 태산은 극단적인 미남은 피하려고 했어요(웃음). 김민이랑 작품을 많이 해서 신뢰하는 부분이 있었고 그가 가진 배우로서의 가능성과 사람 됨됨이를 좋아해요. 초반에 죽는 양반을 임팩트있는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실제로도 절개가 곧은 장현성에게 줬어요. 금성대군은 고결한 왕족이고 유일하게 힘을 가진 선인이에요. 하얗고 잘생기고 기개가 있었으면 좋겠어서 이준혁을 생각했죠."

이어 단종 역을 맡은 박지훈을 향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약한영웅'을 보고 그에게 책을 건넸다는 장항준 감독은 "네 번째 만남 때 하겠다고 했다. 박지훈이 거절했으면 다른 배우가 연기했겠지만 이 정도의 이홍위가 나왔을까라는 의문은 있다"고 두터운 신뢰를 내비쳤다.
"지훈이와 촬영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저의 생각을 말해주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봤어요. 태도가 정말 좋았죠. 그리고 현장에서 제대로 해야 되니까 일대일 리딩도 많이 했어요. 저는 영화를 할 때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데 너무 즐거워요."
'왕과 사는 남자'는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단종과 엄흥도의 관계성이 핵심인 작품이다. 청령포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보수주인과 손님으로 만난 두 사람은 신분에 따라 아랫사람과 상전이 됐다가 밥을 함께 먹는 수평적인 관계로 변화하면서 결국 아버지와 아들 같은 사이로 발전한다.
"신분이 다르고 섬겨야 하는 존재인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단종의 마지막을 지키잖아요. 외피로 보면 충이죠. 조선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충일 수도 있는데 이를 잘 보여주기 위해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아무도 다루지 않았던 단종의 이야기를 엄흥도의 시선에서 바라보며 재미와 의미를 모두 잡은 작품으로 관객들과 만날 준비를 마친 장항준 감독이다. 그는 "삼족을 멸한다고 했는데 친구의 시신을 건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분들을 되돌아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반추하고 역사 속 가치를 기억하고 싶었다"며 "올해 한국 영화계가 다시 살아나는 데 일조하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많은 관람을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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