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래 코미디협회장 "욕심없이 살다 빈손으로 떠났다"
[더팩트ㅣ강일홍 기자] 개그계의 대부 전유성이 25일 밤 향년 7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6일 이른 아침 서울아산병원에 빈소가 차려졌고, 오전부터 추모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 빈소에는 한국방송코미디언협회 김학래 회장을 비롯한 이홍렬 최양락 등 생전 각별했던 고참급 후배들이 유일한 유족인 딸 전제비씨와 함께 상주 역할을 맡아 조문객들을 맞았는데요.
빈소가 차려진 첫 날 낮 시간까지 김병조, 심형래, 팽현숙, 유재석, 김준호, 김지민, 오나미 등이 찾아 고인을 기렸습니다. 공동 상주 역할을 맡은 이홍렬은 카메라 앞에 서자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채 오열을 터트려 모두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이날 빈소에서 만난 최양락은 "제가 월요일까지 일본에 있었는데 유성이 형님의 딸과 사위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이 '내가 이제 떠날 준비를 하는데 너가 제일 생각이 난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다음날 바로 귀국했다"고 말했습니다.
고 전유성은 전날인 25일 밤 9시 5분 경, 입원 중이던 전북대 병원에서 폐 기흉 악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족과 코미디협회는 조문객들의 편의와 공간적 이유를 들어 이날 새벽 전북대병원에서 서울아산병원으로 옮겨 빈소를 마련했습니다.
발인과 영결식은 28일 오전 6시이고, 오전 7시30분 생전 그가 가장 많이 오갔던 KBS 연구동 사잇길 출입구를 통해 스튜디오(TS-15) 등을 거치는 노제를 지냅니다. 장지는 남원시 일월면(수목장 예정)입니다.

<다음은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진 김학래 한국코미디언협회장과 인터뷰>
-며칠 전부터 굉장히 긴박하게 돌아갔잖아요. 오늘 여기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빈소가 마련됐는데 준비하고 매칭시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저야) 고생한 건 없는데 이건 누군가가 이런 거 신경을 써줘야죠. 남원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딸이나 이런 사람들이 자세히 그런 거를 몰라요. 병원도 없고요. 제가 일단 서울로 모셔서 병원에 빈소를 마련하고 화장을 하건 뭐를 하건 해서 다시 내려가 모시고 싶은 곳에 모셔야지, 여기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사람과 관계가 굉장히 두터우신 분인데 안 된다 남원까지 남원까지 그러면 10명 중에 2명 오는 거 아니냐. (맞아요) 여기서 하려니까, 이제 미리, 그러니까 유성이 형도 희극인장에 관해서 (딸한테) 알아보라고 하고, 그 딸이 나한테 '희극인장은 어떻게 하는 거냐' 물어서, 내가 절차만 가르쳐줬어요. 그냥 타이틀이 우리가 다 모든 거를 의전이라든가 사람들 절차 이거를 다 우리가 하고우리가 해서 나중에 결산 다 끝내가지고 이거를 유족들한테 그대로 넘겨주려고 해요."
-희극인장 또는 코미디언협회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빈소가 차려진 게 오늘이 첫날이잖아요. 원래 오늘 '웃는 날 좋은 날' 공연하게 돼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태백(시)에 공연이 오늘 7시에 있어요. (저녁 7시에?) 네, 저녁 7시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버스가 12시에 여의도에서 출발한다고 그랬어요. 다 버스 타고 가야 되니까. 원래는 저도 거기 가기로 돼 있었는데, 그래도 (제가) 장례위원장인데 여기를 그냥 놔두고 가기가 불안해서 '나는 여기 남아 있을 테니까 너희는 가서 공연 잘하고 다시 와라' 그렇게 된 거예요. 오늘 당일이잖아요, 희극인들이 다 약속이 돼 있고, 태백시 관객들과 다 약속이 돼 있고, 행사를 취소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 후배 중에 김정렬 씨가 저 대신 가기로 했습니다."
-전유성 씨 별세 소식을 접하셨을 때 미리 이렇게 예상을 하셨겠지만 막상 세상을 떠나고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아, 난 또 그렇게 금방 올 줄은 몰랐어요. 아니 뭐 '이렇게 오래 가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죠. 그런데 병원에 남아있던 후배들한테 전화 오더니 9시 5분에 돌아가셨다고 딱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제 공연도 있고, 그러니까 이제 별의별 생각이 다 날 거 아니에요. 거기서 내가 유성이 형을 보면서 정신은 말똥한데 몸은 다 이미 상해 있는 거예요. 겉으로 눈으로 보기에도 오래 가진 못하시겠다 싶긴 했죠. 그런데 그게 참 어떻게 보면 가슴이 짠하고 서글픈 게 지금 이게 바로 돌아가실 분하고의 솔직한 얘기들을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중략)
-코미디언협회장으로서 보시기에 전유성 씨는 기인 같은 삶을 살았는데 업적이랄까, 코미디 방송계에 남긴 부분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일단 '개그맨'이라는 단어 자체를 전유성 선배가 만들어낸 겁니다. 그걸 대중에 확산시키고 업그레이드시키고 싶었던 거예요. 우리는 대학교 다 나온 애들이 개그를 하지 않냐, 코미디를 하지 않냐, 그러니까 옛날에 선배 코미디언들은 전부 다 유랑극단 출신들 아니냐, 뭐 조금 사람들이 격하하고 있는데 우리는 좀 다르다. 상품이 다르다라는 뜻으로 '개그맨'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냈죠."

-전유성 씨는 어찌 보면 명성에 비하면 다른 인기 개그맨, 코미디언들처럼 화려한 그런 방송 무대보다는, 저도 기억에 남는 게 청도라든가 이런 지역축제, 이런 소박한 공연에 오히려 좀 몰두했던 것같은데, 이런 독특한 행보가 전유성 씨만의 어떤 색깔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돈에 욕심이 없었어요. 환원하면 큰 돈이 되는데 그런 욕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청도도 그냥 사실은 쉬러 내려갔던 거거든요. 쉬러 내려갔다가 '내가 그러면 여기 청도를 위해서 뭐 해줄 게 없나' 해서 만든 게 바로 '개나 소나 콘서트'예요. ('개나 소나 콘서트' 유명했죠) 개나 소나 와서 구경해라, 사람이 구경 오라는 게 아닙니다. 개나 소가 오라는 건데, '형 그게 말이나 돼?' 그랬는데 나중에 그 개를 안고 진짜 첫 회에 2500명이 온 거예요. 35인 저 오케스트라를 깔아놓고 거기에 와서 개들이 음악을 듣고 가는 거죠. 근데 이게 재미있는 거는 또 날짜가 해마다 하는데,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게 복날, 말복날 해요. 일부러 거기에 맞춰서 복날, 웃기잖아요. 진짜 굉장히 수준 높은 코미디죠."
-전유성 씨가 연명치료를 거부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연명치료를 본인이 거부하고의식 있는 상태에서 여러 가지 사후를 대비한 지시도 하고 떠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모습에서 어떤 철학이라든가 메시지를 말하는 게 있을까요?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내 목숨이 지금 어떻게 왔다 갔다 얼마 안 남았다' 본인도 알아요. '나는 곧 죽어, 나는 곧 가, 내 화장은, 나를 희극인장으로 해달라'. 뭐 이런 얘기를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누워서 내가 곧 죽는데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그게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니죠. (전유성 선배는) 그러니까 마지막 마무리 자기 인생의 마무리까지도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내서 그렇게 지시하고 가신 거예요."
(중략) 풀 영상 인터뷰 전문 참조
-마지막으로 한 마디 말씀을 여쭙겠는데요, 대중과 팬들이 전유성 씨를 어떻게 기억해 줬으면 좋겠는지 지금 현재 코미디협회장으로서 한말씀 해주시죠.
"돈에 전혀 욕심이 없고 오로지 웃길 수 있는, 웃음에 관한 것만 연구하고, 코치해 주고, 남한테 주고, 또 본인도 웃기고. (그런데 전유성 선배는) 그거에 대한 보상을 받지 않았어요. 보상을 전혀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요. 가난해요. 집에 돈이 없어요. (사람은 죽을 때) 결국 돈은 못 가져가요. (네 빈손) 그래서 앞에 남한테 준 거를 참 잘하신 것 같아요. 재능이든 뭐든 다른 걸 주었다. (네 그렇게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빈손으로 가는데."
명예나 명성 대신에 우리는 오로지 웃음만을 위해서 살다가 또 빈손으로 가셨다,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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