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육군소좌 모리 다쓰오 役 맡아 강렬한 존재감 발산
"역사의 줄기 따르지 않고 상상하면서 캐릭터 만들어가"
[더팩트|박지윤 기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인물을 집요하게 좇는, 제국주의에 심취된 인물을 연기하는 건 배우이자 사람으로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미움받을 용기를 품고 긴 여정을 끝낸 '하얼빈'의 박훈이다.
지난달 24일 스크린에 걸린 영화 '하얼빈'(감독 우민호)으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박훈은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카페에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날 그는 개봉하자마자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에 관해 "감개무량해요. 요즘 극장에 이렇게 많은 분이 찾아와주시는 게 감사하다는 걸 새삼 느껴요"라고 소감을 전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꺼냈다.
작품은 1909년,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하는 이들과 이를 쫓는 자들 사이의 숨 막히는 추적과 의심을 그리는 첩보 액션 대작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과 '내부자들' 등을 통해 스타일리시한 연출력을 보여준 우민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박훈에게 '하얼빈'은 다른 작품보다 더 뜻깊을 수밖에 없다. '남산의 부장들'로 첫 호흡을 맞췄던 우민호 감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통편집된 후 우 감독과 이렇다 할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그는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는데 '우민호입니다'라고 하시면서 모리 다쓰오라는 역할에 제가 생각났다고 하시더라고요"라며 "말 그대로 러브콜이잖아요. 처음 받아봐서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대본을 보고 너무 하고 싶었고요"라고 출연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극 중 모리 다쓰오는 일본을 향한 맹목적인 애국심으로 점철된 일본군 육군소좌로, 신아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쟁포로로 붙잡혔지만 안중근(현빈 분)의 선의로 풀려난 이후 오히려 그에 대한 모멸감에 휩싸이고 대한의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격을 준비하는 인물이다.
앞서 영화 '서울의 봄' '노량: 죽음의 바다' '한산: 용의 출현' 등 시대극에서 남다른 존재감을 발산해 온 박훈은 이번에 삭발과 헤어라인 문신을 감행하고, 강인함과 비열함 사이를 오가는 캐릭터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지금껏 본적 없는 새로운 얼굴을 꺼냈다.
특히 그는 일본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박훈은 대본에 쓰인 글자 그대로를 암기했을 거라는 기자의 예상을 완벽히 벗어나는 준비 과정을 들려줘 놀라움을 안겼다. 이와 관련해 그는 "제가 일본어를 외워서 제 맘대로 하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어 선생님도 배우를 하시는 분이라서 제 한국어 연기를 먼저 가르쳐드렸죠"라고 회상했다.
"'나는 이런 숨을 쉬고 이런 호흡에 연기를 한다'면서 저의 한국어 연기를 완벽하게 습득하게 한 다음에 그 호흡대로 일본어 연기를 해달라고 했어요. 사람마다 숨과 호흡이 다르잖아요. 제가 말을 배워서 하게 되면 호흡이 달라지더라고요. 제 숨이 아닌 곳에서 숨을 쉬는 거죠. 바디랭귀지를 할 때도 호흡으로 뉘앙스를 파악하잖아요. 그러니까 결국 숨을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걸리지만 그렇게 연기했을 때 발음은 틀릴 수 있어도 뉘앙스적으로는 이상하지 않았죠."
안중근과 독립군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에서 그들을 집요하게 좇고 처단하는 일본군 육군소좌를 연기하는 건 배우로서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도 그 누구보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박훈은 미움받을 용기를 갖고 작품에 뛰어들었다고.
"대본을 보면 현장에서 외로웠을 건 안중근이지 않았을까요. 저는 승리자의 입장이었잖아요. 독립군들이 힘들지 제국주의 일본이 힘든 상황은 아니거든요. 승리자의 입장에서 감정을 동화하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강하게 압박을 가하면 가할수록 독립군들의 정당성이 생긴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안중근 장군의 전사를 찾아보지 않았고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 판단하려고 했죠. 역사를 공부해서 계산하고 싶지 않았어요. 모리 다쓰오는 가상의 인물이니까 굳이 역사의 줄기를 따르지 않고 제가 상상하고 만들어가려고 했죠."
그런 점에서 극 중 모리 다쓰오가 안중근을 집요하게 좇으며 '안중근와 도코다(안중근은 어딨어)'라고 말하는 대사를 가장 신경 썼다는 박훈이다. 여러 버전이 있었지만 같은 문장으로 연기했다는 그는 "일본어로 연기하지만 이 대사를 관객들에게 남기고 싶었어요. 이 광적인 대사가 관객들에게 닿는다면 '너의 DNA와 혼은 어디 있니?' '미처 잊고 살았던 작은 한 걸음은 어디 있니?'라는 걸 상징적으로 던져주고 싶었어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릴리 프랭키(이토 히로부미 역)가 영화를 보고 '안중근와 도코타'라고 인사를 해서 고맙다고 했어요"라고 웃으며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질문을 던지는 캐릭터이고 싶다고 했어요. 악역으로서 위압감만 주는 게 아니라 '나에게도 작은 한 걸음이 있지 않았나?'라고 반문할 수 있는 캐릭터로서 상징성을 띠고 싶었어요"라고 덧붙였다.
그런가 하면 박훈은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2018)을 시작으로 영화 '공조2: 인터내셔날'(2022)에 이어 '하얼빈'까지 세 작품을 통해 현빈과 연기 호흡을 맞추게 됐다. 두 사람의 인연이 더욱 신기한 건 세 작품 모두 박훈이 현빈을 집요하게 추격하는 인물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감독님이 공교롭게도 둘이 함께한 전작들을 못 보셨더라고요. 그래서 선입견이 없으셨어요"라며 "현빈 씨는 개인적으로 너무 편하고 좋아하고 잘 맞는, 저보다 훨씬 매체 경험이 많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했기 때문에 저에게 도움을 많이 줬어요. 현빈이 현장에서 힘들다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어요. 현장에서의 태도를 정말 많이 배웠죠"라고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미움받을 용기를 안고 작품에 임한 박훈은 '하얼빈'에 관해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시 같은 영화예요. 다 다르게 여백을 느끼실 거고요. 극장에서 보면서 영화적 재미와 영화적 매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더라고요"라고 자신하며 "스코어는 많이 들수록 좋죠(웃음). 그런데 지금의 시장을 보면 한 분 한 분이 진심으로 소중해요. 시장의 형태와 극장에서 소비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잖아요. 그러니까 극장을 찾아주시는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무대인사를 할 계획"이라고 많은 관람을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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