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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곡(111)] 장덕 '소녀와 가로등', 비운의 천재가수 명곡

  • 연예 | 2023-03-16 00:00

중학교 2학년 때 작사 작곡, 신인 진미령 서울가요제 출전곡
서른 나이에 요절, 정수라 이선희와 '여자 가수 바지 삼총사'


장덕이 남긴 '소녀와 가로등'은 그가 중학교 2학년 때인 75년 작사 작곡한 노래다. 진미령이 77년 서울가요제출품작으로 불렀고, 이듬해인 78년 자신이 직접 불러 독집 앨범으로 발매했다. /온라인팬커뮤니티 캡처
장덕이 남긴 '소녀와 가로등'은 그가 중학교 2학년 때인 75년 작사 작곡한 노래다. 진미령이 77년 서울가요제출품작으로 불렀고, 이듬해인 78년 자신이 직접 불러 독집 앨범으로 발매했다. /온라인팬커뮤니티 캡처

[더팩트ㅣ강일홍 기자] 팬들의 가슴을 울린 명곡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깊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갓 서른의 나이에 요절한 가수 장덕은 작사 작곡가로 천재적인 음악성을 보여준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은 지금도 당대 뮤지션으로서 그의 평가는 인정을 받는다.

음악적으로 당시 대한민국 음악계의 수준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코드워크(코드진행)와 보이싱(화성을 구성하는 음의 배치를 바꾸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단번에 신드롬이 될 만큼 뛰어난 멜로디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덕이 남긴 '소녀와 가로등'은 그가 중학교 2학년 때인 75년 작사 작곡한 노래다. 이 곡은 장덕의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송창식이 장현의 즉석 기타 연주와 노래로 들어보고 감탄, 갓 신인 진미령으로 하여금 서울가요제에 출전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장덕은 작사 작곡자로서 무대에 섰다.

'조용한 밤이었어요 너무나 조용했어요/ 창가에 소녀 혼자서 외로이 서있었지요/ 밤하늘 바라보았죠 별 하나 없는 하늘을/ 그리곤 울어버렸죠 아무도 모르게요/ 창밖에 가로등 불은 내 맘을 알고 있을까/ 괜시리 슬퍼지는 이 밤에 창백한 가로등만이/ 소녀를 달래주네요 조용한 이 밤에/ 슬픔에 지친 소녀를 살며시 달래주네요'(장덕의 '소녀와 가로등' 가사 1절)

천재가수로 불린 장덕은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에서 자란 영향이 컸다. 팬들의 가슴에 그는 작사 작곡가로 천재적인 음악성을 보여준 여성 대표 싱어송라이터로 남아 있다. /앨범재킷
천재가수로 불린 장덕은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에서 자란 영향이 컸다. 팬들의 가슴에 그는 작사 작곡가로 천재적인 음악성을 보여준 여성 대표 싱어송라이터로 남아 있다. /앨범재킷

77년에 개최된 MBC 서울가요제에서는 혜은이가 '당신만을 사랑해'로 최우수 작품상과 최우수 인기상을 거머쥐었다. '소녀와 가로등'은 입상은 불발됐지만 이후 수많은 뮤지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명곡으로 자리매김한다. 당시 열 일곱살 소녀가 지휘자로 무대에 선 모습은 시청자들에게도 유난히 돋보였다.

신인가수 진미령은 이 곡을 통해 실력을 입증한 뒤 '하얀민들레'로 대중가수로 인지도와 입지를 탄탄히 다지는 계기가 됐다. '소녀와 가로등'은 진미령의 대표곡이면서 장덕의 인생곡이기도 하다. 장덕은 이듬해인 78년 자신이 직접 불러 독집 앨범으로 발매했다.

장덕이 활동했던 시기는 여자 싱어송라이터가 손에 꼽을만큼 드물었던 때다. 84년 데뷔한 이선희조차 96년 10집에 와서야 자신이 작곡한 곡을 앨범에 실었을 정도였으니 그의 활약은 더욱 빛이 난다. 바지 차림을 고집해 당시 정수라 이선희와 함께 '여자 가수 바지 삼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의 영향이 컸다. 장덕의 아버지인 장규상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서양 화가 이숙희였다. 그럼에도 외로운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장덕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 그녀의 부모는 이혼했다.

장덕은 감기약과 기관지 확장제, 수면제 등을 동시 복용한 뒤 약물 쇼크로 세상을 하직했다. 오빠 장덕도 6개월 후인 90년 8월 향년 34세의 나이에 떠나면서 비운의 남매가수로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온라인팬커뮤니티 캡처
장덕은 감기약과 기관지 확장제, 수면제 등을 동시 복용한 뒤 약물 쇼크로 세상을 하직했다. 오빠 장덕도 6개월 후인 90년 8월 향년 34세의 나이에 떠나면서 비운의 남매가수로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온라인팬커뮤니티 캡처

유년시절 이런 평탄치 못한 가정환경이 예술가로서 집중력을 발휘하는 동력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장덕의 작품은 총 136개에 이른다. 생전 약 300여곡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는데 짧은 생에 비하면 엄청난 열정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는 1975년 4월 만 13세에 이미 오빠 장현과 함께 '드래곤 래츠'라는 듀엣명으로 통기타를 메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미8군 주최의 파티 무대)에서 'To Be A Child Again'으로 데뷔했다. 남매는 당시 클럽의 쇼 매니저로부터 찬사를 들으며 정식 출연 계약을 할만큼 인기였다.

장덕은 대중 가수로 성장한 뒤에도 계속 외로운 생활을 해야했다. 미국인과 재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던 어머니의 권유로 미국 유학과 결혼, 이혼, 그리고 향수병에 시달리다 귀국했지만 여전히 외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세상에서 가장 믿고 따랐던 오빠 장현이 설암에 걸리면서 아픔은 더 깊어졌다. 오빠 병간호 중 감기약과 기관지 확장제, 수면제 등을 동시 복용한 뒤 약물 쇼크로 세상을 하직했다. 오빠 장덕도 6개월 후인 90년 8월 향년 34세의 나이에 떠나면서 비운의 남매가수로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ee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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