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살린 디테일·개성 첨가 레트로 패션
[더팩트 | 유지훈 기자] 담배연기 자욱한 사무실, 학력에 따라 달리 지급되는 유니폼, 여자 사원들이 도맡아 하던 커피와 담배 심부름 등은 이제 모두 과거일 뿐이다. 비슷한 일이 2020년 벌어진다면 "시대가 어느 땐데"라는 질타가 따를 터다. 그런데 최근 한 영화는 이 풍경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한동안 관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지난달 21일 개봉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은 최근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코로나19 여파로 관객 동원이 어려운 영화시장을 고려한다면 의미 있는 호성적이다. 작품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5년 을지로의 사무실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사회에서 약자중의 약자였던 고졸 출신 여성인 이자영(고아성 분) 정유나(이솜 분) 심보람(박혜수 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세 사람은 회사가 페놀 폐수를 무단으로 방류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구성된 요소들은 무겁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유쾌함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살려내기 위한 장치들도 작품 곳곳에 숨겨뒀다. 조금은 특별한 세 배우의 캐스팅 과정, 영화 속 캐릭터처럼 '찐친'이었던 배우들의 연대, 시대상을 반영한 세밀한 연출, 당시의 낭만을 살려낸 패션 등 영화를 더욱 빛낸 요소들을 정리해봤다.
어제의 동료, 오늘의 감독
연출을 맡은 이종필 감독은 다수 작품에서 활약해온 배우이기도 하다. 그래서 몇몇 배우들과 동료로서 현장에서 호흡했고 이솜과는 짧지만 아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10여년 전 그는 영화 '푸른소금'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이솜의 차를 얻어 탄 적이 있다. 별일 아닌 척 '츤데레'처럼 챙겨준 이솜을 떠올리고는 이와 딱 맞는 정유나 역으로 캐스팅했다.
고아성 역시 3년여 전부터 이 감독과 알고 지내온 사이다. 고아성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하고 난 후 꼭 캐스팅하고 싶은 마음에 진심을 담아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하지만 고아성은 이미 편지를 받기 전 출연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박혜수는 이 감독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지만 감독이 주인공 3인방 가운데 가장 큰 애정을 품고 있는 심보람 캐릭터를 제안받았다.
세 배우가 '찐친'이 되기까지
고아성 이솜 박혜수는 영화처럼 '찐친'이 되기 위해 지방 촬영 도중 합숙을 자처했다. 3인 1실을 배정받아 함께 생활했다. 맏언니 이솜은 동생들을 위해 요리를 도맡아 직접 식자재를 사러 다니기도 했다. 고아성은 리더의 포지션으로 중심을 잡았고 박혜수는 막내로서 두 사람을 따랐다. 다음 날 촬영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눴고 술도 곁들이며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현실에서도 '찐친'으로 거듭난 세 캐릭터지만 개성도 사고방식도 각양각색이다. 감독은 이를 지하철에서 세 사람이 헤어지는 장면에 녹여냈다. 자영은 홀로 반대편의 지하철을 타고 먼저 떠난다. 초반부 혈혈단신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당찬 면모를 담았다.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정유나 심보람 역시 같은 지하철에 몸을 실은 후 집 방향이 달라 도중 헤어진다. 한마음으로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지만 성장 배경은 다르다는 캐릭터들의 숨은 설정이다. 여담으로 이 장면의 배경이 된 지하철역은 촬영 다음 날 현대식으로 탈바꿈하는 공사에 들어갔다.
95년 을지로 배경의 '먹방' 영화
영화에는 유독 캐릭터들이 먹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퇴근 후에는 먹태 골뱅이와 함께 맥주를 곁들이고 쉬는 시간에는 간편하게 먹기 좋은 과자와 우유 아이스크림을 맛본다. 넉넉한 인심을 자랑하는 남대문시장의 칼국수와 꽈배기, 포장마차의 떡볶이 등 군침 도는 음식들이 스크린에 연신 펼쳐진다.
단순히 관객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준비한 '먹방'이 아니다. "야근이 일상이었을 1995년 회사원들에게 음식이라도 마음껏 먹게 해주자"는 이 감독의 배려다. 반면 집에서의 생활은 일절 담겨있지 않다. 밤늦게 퇴근해 집에 들어가니 이렇다 할 여가도 없이 잠을 청했을 당시 회사원들의 삶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1995년 그때 그 추억 그대로
IMF가 몰아치기 직전 90년대는 개인주의가 막 꽃을 틔우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각양각색 자신의 개성을 패션으로 나타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미술팀과 의상팀 분장팀은 당시의 향수를 살려내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하지만 이질감을 느낄 수 있을 어린 관객들을 고려해 캐릭터마다 독자적인 스타일을 부여했다.
자기주장이 확실한 유나는 90년대 유행한 금 액세서리와 롱부츠 미니스커트 그리고 파워숄더 정장룩을 주로 입었다. 수학천재 보람은 유행에 관심이 없다는 설정에 따라 롱원피스와 이를 다 덮은 롱코트다. 자영은 세미 정장으로 편안함과 멋을 다 잡았다. 누군가에게는 추억을 자극하고 2020년의 청춘들에게는 특별한 볼거리인 '삼진그룹 영어토익반'만의 레트로 패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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