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구름과 비' OST로 9년 만에 복귀, "팬 곁에 한 발 더 가까이"
[더팩트|강일홍 기자] '뉴욕 카네기홀 120여년 역사상 세계 남성 성악가 중 최연소(17세) 첫 독창회 전석 매진, 한국인 음악가 최초 3대 전홀(아이작스턴 오디토리움, 잔켈, 웨일 리사이틀) 솔리스트(단독공연자) 공연 , 아시아 최초의 그래미상 심사위원 위촉'.
팝페라 테너 임형주(34)가 세운 기록이다. 그는 기록의 사나이다. 서울 신용산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98년 4월 당시 만 12세의 나이로 자신의 첫 독집을 냈다. 삼성그룹 산하 삼성영상사업단의 삼성뮤직(삼성클래식스) 레이블로 발표된 이 음반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글로벌 뮤지션의 탄생을 알렸다.
5년 뒤 그는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무대에 올라 헌정 사상 역대 최연소의 나이(17세)로 애국가를 선창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이 장면은 국내 지상파 3사는 물론 미국 CNN, 영국 BBC, 일본 NHK, 중국 CCTV 등 해외 140여개국 주요 월드채널에 위성송출(생중계)돼 세계적으로 그의 존재감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국내 대중문화계에서도 뚜렷이 빛이 났다. 임형주는 2012년 11월 대관 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서 첫 정통 클래식 독창회를 가졌다. 이는 1988년 개관 이래 소프라노 조수미, 가수 조용필, 조영남 이후 역대 4번째이자 최연소 단독콘서트 무대였다.
이듬해인 2013년에는 서울 국립극장 (세계 데뷔 10주년 및 국내 데뷔 15주년) 콘서트로 대한민국 3대 공연장(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석권한다. 역시 27세 나이의 국내 최연소 아티스트로 기록돼 있다.
임형주는 최근 TV사극 '바람과 구름과 비' OST 곡을 부르며 대중 앞에 돌아왔다. 예능프로그램에도 모습을 들어냈다. 그를 반기는 팬들한테는 단비 같은 소식이다. 한동안 국내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월드 아티스트 임형주를 직접 만났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재)아트원문화재단 산하 소르고 유아원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최근 TV 사극 '바람과 구름과 비' OST 곡을 부르며 대중 앞에 돌아왔다. 한동안 국내 활동이 뜸했는데 OST 참여는 얼마만인가?
네, 정말 오랜만에 드라마 OST로 인사를 드리게 됐어요. OST는 2011년 이후 9년 만인 것같아요.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다 보니 국내에선 뵐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음악적 활동을 쉰 적은 없어요. 그 사이 군 병역 의무도 마쳤고요. 가끔이라도 TV같은 대중 매체에 나가지 않으면 저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지는 것같아요. 이번 OST 복귀를 계기로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했는데 다들 반갑게 맞아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앞으로는 팬들과 좀더 가까이서 호흡하며 공감대를 만들어가고 싶어요.
임형주가 부른 '바람과 구름과 비' 러브테마 OST 곡 '영원'은 자신이 직접 작사하고 유명 음악감독 이상훈이 작, 편곡했다. 한국적인 정서에 깃든 아련한 곡조와 한 편의 시조를 연상시키는 듯한 애틋한 가사가 극의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40인조의 코리안 내셔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한마음국악합주단까지 가세, 웅장하고도 섬세한 한편의 동양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동안 그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쾌걸춘향' '왕과 나' '동이' '계백' 등 국민 사극 드라마의 OST를 불러 대중적 친숙함을 더했다.
-대면 인터뷰가 쉽지 않은 월드스타라서 왠지 말수가 적고 자기 세계에 몰입된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매우 소탈하고 유쾌하다.
네, 맞아요. 강 기자님께서 방금 저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셨어요. '최초' '최연소' 등 그동안 쌓은 음악적 평가와 스펙 만으로 저를 만나보기도 전에 그런 선입견을 갖는 분들이 많아요. 더 잘 아시겠지만 매스미디어를 통해 일부분만 부각돼 비치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제 성격은 원래 밝은 편이에요. 그리고 자신감과 자만심은 전혀 다른 개념이에요. 저는 능력있는 부모님 덕분에 비교적 유복했하게 자랐지만,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죠. 지금껏 단 한 번도 게으르거나 나태해본 일이 없어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수록 더 고개숙여야 한다는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죠.
임형주는 처음 예상했던대로 우선 논리적이면서 차분했다. 정확하고 분명했다. 자신을 향한 대중의 잘못된 인식이나 오해 부분에 대해서는 그 과정과 배경까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런데 느낌은 전혀 차갑지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인간미가 인상적으로 와닿았다. 필자가 다소 의외라고 생각이 들만큼 그는 겸손하고 친근감이 느껴졌다. 왜일까 궁금했다. 그는 "솔직함 만큼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건 없다"면서 "무엇보다 말을 에둘러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30대 중반의 나이인데 벌써 데뷔 20주년이 됐다. 쌓아온 커리어만 보면 '세계적 거장'이란 표현조차 무색할 정도다.
제 나이에 '거장'이란 호칭은 좀 부담스럽긴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정을 무시한 채 결과만 말하려고 해요. 저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천재적 재능을 갖고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죠. 저는 삶의 과정을 매우 중시해요. 결과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인생의 90% 이상은 과정이라고 믿어요. 사실 저의 지난 20년을 반추해 보면 개인적으로 고통의 시간들이 더 많아요.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없이 채찍질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견뎠어요. 수도승처럼 고난과 고독의 연속이었죠.
임형주는 술과 담배를 일체 가까이 하지 않는다. 성대 보호를 위해서다. 온몸이 악기이다 보니 독창회를 앞두고는 각별히 체력관리에 신경을 쓴다. 보디케어 하나 하나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아시아 출신으로 세계 무대에서 최정상 실력의 팝페라 가수로 인정받기까지 임형주는 인고의 자기관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알고보면 세계적으로 우뚝 선 그의 월드 커리어는 땀과 노력의 결정체다. 그는 "잘 모르는 분들은 제가 온실속의 화초처럼 케어만 받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가풍이 엄한 보수적 집안이어서 스스로 할 일에 대해선 잣대가 더 엄격했다"고 말했다.
-좀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이긴 한데 솔직한 심경을 듣고 싶다. 국내 활동을 멈춘 데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이 있다는 말도 있었다.
강 기자님께서 먼저 말씀해주신대로 정말 대답하기 껄끄럽고 불편한 얘기예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블랙리스트이든 화이트리스트이든 저는 어느쪽도 원치 않아요. 바람이 있다면 단지 팝페라 가수로 대중과 자유롭게 호흡하는 것 뿐이죠. 인위적으로 만든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는 건 누군가 정치적으로 자의적 판단을 해 편을 가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행히 제 이름이 명단에 들어 있진 않아요. 논란 인물에서는 비켜나 있는 거죠.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배제됐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분명한 건 확실하게 차별을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임형주가 뭔가 정권 차원에서 차별을 가한다는 느낌을 처음 감지한 것은 Mnet 청소년음악오디션프로그램 '위키드'(WE sing like KID, 2016년) 때다. 당시 그는 멘토 겸 심사위원장을 맡아 한창 프로그램이 진행중이었는데 결승 하루를 앞두고 제작진으로부터 도중 하차 통고를 받았다. 통상적으로 결선 방송을 앞두고 심사위원장을 낙마시키는 일은 방송 생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 사실이 궁금했고, 끝내 제작진을 통해 왜 하차 해야했는지를 확인했다. 제작진은 '정권의 윗선을 통해 하달된 내용이라고 들었다'며 그에게 깊은 유감 표시와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故 노무현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무대에 올라 헌정 사상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애국가를 선창했다. '천개의 바람이 되어'는 세월호 추모곡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음악을 했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데뷔해 주목을 받았어요. 국내든 해외든 여러 의미를 담은 큰 무대에 많이 섰어요. 어떤 무대라도 설 수 있고, 더구나 국민적 중대 행사라면 색깔을 가려 선택할 사안도 아니에요. 보수니 진보니 이런 구분과는 애초 거리가 멀죠. 물론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이 참석하신 국가적 이벤트에도 모두 섰고요. 앞에서도 말씀드린대로 저는 굉장히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어요. 故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애국가를 많이 기억하시지만 당시 저는 겨우 17살이었어요. 어떤 의도나 목적이 개입될 여지가 없잖아요.
임형주는 자신의 말처럼 정치적으로는 무색무취다. 다만 인권, 평화, 자유, 평등 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엔 늘 발벗고 나선다. 그가 YWCA 역사상 최초 홍보대사를 맡거나 위안부 지원 행사에 노개런티로 공연하는 것은 이런 순수한 마음의 발로다. 자신의 대표곡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세월호 추모곡으로 헌정한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다. 일본 작곡가 아라이 만이 작곡한 J-POP '천 개의 바람이 되어'(千の風になって, A Thousand Winds)는 임형주가 다시 발표한 뒤 미국과 일본에서도 더 뜨겁게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는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만큼 뮤지션으로는 물론이고 프로페서로도 인정받고 있다는 반증 아닌가.
원래는 교수를 꿈도 꾸지 않았어요. 교수직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도 거절했던 이유가 플레이어(현역 뮤지션)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유럽에는 뮤지션을 꿈꾸는 아시아계 유학생들이 상당히 많아요. 특히 중국학생들이 많은데 그만큼 아시아 지역이 클래식 강국으로 인정받는 추세이기도 해요. 제가 석좌교수로 임용된 건 여러 상황적 여건이 적절하게 잘 맞아떨어진 부분도 있어요. '교수직과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이 보장돼야 한다'는 제 요구가 학교 측에는 다소 까다로울 수 있었지만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어쨌든 대한민국 뮤지션으로서 자부심과 함께 묵직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임형주는 유럽에서 인정받는 유일한 크로스오브뮤지션이다. 이런 위상을 반영하듯 그는 지난 2015년 11월 한국인 최초로 이탈리아의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에 종신 명예교수로 임용됐다. 이듬해인 2016년 7월에는 종신 석좌교수로 보직 이동됐다. 현재까지 5년째 최연소 석좌교수로 활동 중이며 이 역시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당초 그는 '프로페서보다 플레이어로 남고 싶다'며 완곡하게 교수직을 사양했지만 학교 측이 그를 끌어안기 위해 마스터클래스급(석사과정 이상) 강의라는 파격적인 조건과 함께 겸직을 허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인이 인정하는 자타공인 글로벌 팝페라테너로 우뚝 서 있다. 문화 강국, 팝페라 종주국의 뮤지션으로 향후 꼭 이루고 싶은 바람이 있다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메라 선생님과 합동 공연을 하고 싶어요. 팝페라의 세계적 명성을 구축한 주인공이시잖아요. '팝페라'는 1985년 영국 신문 데일리 익스프레스가 김 선생님과 인터뷰하면서 처음 소개한 신조어예요. 이후 BBC 매거진과 미국 CNN 등이 한국출신 팝페라 가수로 대서특필하면서 종주국의 위상을 얻었어요. 올해를 팝페라 탄생 35주년으로 꼽는 것도 이 때문이죠. 선생님은 다른 이유로 전혀 활동을 하지 않고 계세요. 당장 올해나 내년이 어렵다면 5년 뒤인 40주년에라도 선생님과 꼭 한번 콜라보를 해보는 게 저의 소망입니다.
팝페라 가수 키메라의 본명은 김홍희다. '키메라'(Kimera)라는 예명은 자신의 성(姓)인 Kim과 음악 장르 중 하나인 Opera에서 따왔다. 그의 첫 번째 앨범은 'The Lost Opera'로 1985년 발매됐다. 주 활동무대는 스페인과 프랑스였으며 팝페라 장르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성신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소르본누벨대학교 대학원 불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레바논 출신의 사업가 레이몽 나카시안과 결혼했다. 2007년 6집 'With love caruso'를 내며 활동을 재개했지만, 현재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 중이다.
월드스타 임형주의 본성은 부드럽고 편하면서 자유분방한 성격이다. 누구와도 쉽게 친숙해지고 속내를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 스타일이다.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털털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비쳐지기를 희망한다. 그럼에도 절제된 행보에 익숙한 것은 자신이 쌓아온 커리어의 무게감 때문이다.
임형주는 팝페라를 뛰어넘어 크로스오버 대중적 장르를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트로트에도 익숙하다.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등 전통 트로트 가요를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알고보면 장르 파괴를 먼저 시도하고 트렌드를 앞서간 셈이다.
"군 입대 직전 트로트곡을 제 목소리에 담아 음반을 만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무렵 '미스트롯' 바람이 불었어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트로트 장르를 협업한 것만으로도 확실히 의미가 있었죠. 하필 시기가 그렇다 보니 트로트 바람에 편승해 음반을 낸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아 아쉽지만 발표를 보류하고 말았어요. 반드시 다시 선보일 기회가 있겠죠."
임형주는 데뷔 이후 사회공헌 및 기부, 나눔 봉사활동에도 앞장서왔다. 그가 유명해지면서 선한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정부기관들은 물론 각종 NGO단체, 주요 자선 봉사단체들의 홍보·친선대사로도 활동했다. 또 데뷔 이후 자신이 벌어들인 수익금의 대부분을 비영리 재단에 기부하는 등 새로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
임형주의 진짜 매력은 음악적 열정과 성취 뒤에 가려진 따뜻한 인간미다. 유럽 영주권을 포기하고 병역 의무 이행을 고집한 것은 확고한 국가관의 소신이고, 소집해제 후 국방부, 병무청, 복지관이 잇달아 공로상을 준 것은 그가 보여준 어르신들에 대한 공경과 헌신의 결과였다. 몸에 밴 겸손과 유쾌함은 필자의 눈에 또 다른 월드 스타의 진면목으로 비쳤다.
ee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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