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쓰는 게 저의 일"
[더팩트|박슬기 기자] '기생충'의 기세는 대단했다. 코피까지 흘려가며 오스카 캠페인을 벌인 '기생충'의 주역들은 6개월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한국에 금의환향했다. 어떤 감상평을 남길 만한 육체적,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이들은 이제야 여유를 되찾고, 미소 지었다.
19일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이 열렸다. 지난밤 '코로나 19' 추가 확진자가 집단으로 발생한 가운데서도 국내외 외신들은 마스크를 끼고 발 디딜틈 없이 모여들었다. 아카데미 최고 작품상을 받은 '기생충'의 영향력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행사 시작 1시간 전부터 많은 사람이 일찌감치 도착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장에 입장하기 위해 긴 줄을 섰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앞서 마블스튜디오의 작품에 출연한 할리우드 스타들이 내한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도 줄을 설 정돈 아니었던 만큼 '기생충'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이날 자리에는 봉준호 감독,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박소담, 이정은, 장혜진, 박명훈, 곽신애 대표, 한진원 작가, 이하준 미술감독, 양진모 편집감독 등이 참석했다. 최우식은 영화 촬영 일정으로 불참했다. 진행은 방송인 박경림이 맡아 아카데미상과 관련한 다양한 뒷이야기를 나눴다.
'기생충'은 앞서 지난 9일(현지 시간)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작품상을 더불어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이는 한국영화사 101년, 아카데미 사상 9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봉준호 감독은 많은 취재진의 모습에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기생충' 제작발표회 한 지가 1년이 되어 간다"며 "영화가 긴 생명력을 가지고 세계에 다니다가 마침내 여기로 오게 돼서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봉 감독이 입을 열자 카메라 셔터가 쉴 새 없이 터지며 그에게 주목했다.
봉 감독은 이내 여유를 찾고, 특유의 위트있는 발언으로 기자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개그맨 유세윤과 문세윤이 아카데미 수상 소감 패러디를 한 것을 언급하며 "유세윤 씨 참 천재적인 것 같다. 존경한다. 문세윤 씨도"라고 말해 웃음을 더했다. 앞서 유세윤은 통역가 샤론 최로, 문세윤은 봉 감독으로 분장하고 수상소감을 패러디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어 봉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은 로컬 시상식이다'라는 발언에 대해 "처음 오스카 캠페인을 하는 주제에 설마 아카데미를 도발 하겠냐"고 해명했다. 봉 감독은 "칸, 베를린, 베니스는 국제영화라면 아카데미는 미국 중심이 아니겠나 하면서 비교하면서 나온 이야기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젊은 분들이 트위터에 많이 올렸나 보더라. (상을 받기 위해) 전략을 가지고 이야기한 건 아니고 대화할 때 자연스럽게 나온 거다"라고 부연했다.
'기생충'은 지난해 8월부터 약 6개월의 시간 동안 꽤 긴 시간 오스카 캠페인을 벌였다. 한국 최초로 이 캠페인을 한 '기생충'은 국내 배급사 CJ와 미국 중소 배급사 NEON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이뤄졌다. 하지만 미국 거대자본 영화의 캠페인에 비하면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봉 감독 역시 이를 인정했다. 그는 "거대 스튜디오, 넷플릭스에 비하면 저희는 훨씬 못 미치는 예산으로 열정으로 뛰었다"며 "그 말인 즉슨 저와 (송)강호 선배님이 코피 흘릴 일이 많았다. 실제 코피를 흘린 적도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다른 작품은 LA 시내에 거대한 광고판, TV나 잡지에 전면광고를 냈다면 저희는 똘똘 뭉쳐서 팀워크로 캠페인에 열심히 일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봉 감독과 긴 여정을 함께 한 송강호는 "처음 경험하는 과정이라 아무 생각 없이 갔다고 해도 무방하다"며 "6개월 동안 최고의 예술가들과 호흡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참 많은 걸 느끼고 배웠던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연기 좀 하고 싶다"고 토로해 웃음을 자아냈다. 송강호는 할리우드 진출을 묻는 말에 "저는 할리우드 말고 국내에서라도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마지막 촬영이 작년 1월 말이었다. 지금 13개월째 아무것도 못 했다. 국내에서라도 일을 좀 하고 싶다"고 말해 장내를 폭소케 했다.
송강호는 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최고 작품상 부문 발표됐을 때 영상을 자세히 보시면 제가 굉장히 자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제가 칸 영화제 때 과도하게 기뻐하는 바람에 감독님 갈비뼈에 실금이 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이번에는 감독님 얼굴 위주로 쳤다. 굉장히 자제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해 또 한 번 웃음을 줬다. 봉 감독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인정했다.
이날 현장에는 '역대급' 많은 수의 취재진이 참여해 열띤 취재 경쟁이 이어졌다. 때마침 BBC의 한 기자가 질문을 했고, 봉 감독은 "샤론 최가 없는 자리에서 영어를 들어 당황했다"고 재치 있게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샤론 최는 봉 감독과 오스카 캠페인을 함께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통역을 맡은 인물로, 큰 관심을 받은 바 있다.
기분 좋은 결과를 얻은 만큼, 기자회견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박소담과 이정은, 조여정, 이선균, 장혜진, 박명훈은 "여전히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게 꿈같다"며 "국민 여러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더 기쁘다"고 말했다.
곽신애 대표는 연신 미소를 지으며 아카데미 수상의 기쁨을 표했다. 그는 "아카데미 트로피를 어떻게 나눴냐"는 질문에 "노미네이션된 상 2개를 포함해서 총 6개 트로피를 받았다. 아카데미에서 지정해 놓은 수상자 이름이 있어서 각자 자기 것을 챙겨갔다"고 말했다.
이선균은 영화 속 대사를 빗대 재치 있는 아카데미상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는 "저희가 어느 선을 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4개 부문 상을 받고 나니까 아카데미가 선을 넘은 것 같다"며 "우리 영화를 좋아해 준 아카데미 회원들께 감사드린다"고 감사 인사를 했다.
박소담은 '기생충'에서 부른 '제시카송'으로미국에서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마침 좋은 연락을 주셔서 현지에서 색다른 화보를 찍고 왔다"며 "'기생충'이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저에게도 많이 관심을 주는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할리우드)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 가운데 자유한국당의 봉준호 관련 공약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총선을 앞둔 자유한국당 TK지역 예비 후보들은 앞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고향인 대구에 동상과 생가 복원 등을 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웠다.
봉 감독은 당황스럽다는 듯 "안 그래도 기사를 봤는데 동상이랑 생가 그런 이야기는 제가 죽은 후에 해주셨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이어 그는 "'이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하는 마음으로 넘겼다"며 "그걸 가지고 제가 딱히 할 말은 없다"고 말했다.
이날 함께 자리한 한진원 작가와 이하준 미술감독, 양진모 편집 감독은 "스태프로서 이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신기하다"며 "항상 영화 뒤편에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게 고생해준 아티스트들이 있어 가능했다"고 많은 스태프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렸다.
현재 번아웃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봉 감독은 "사실 '옥자' 끝났을 때 이미 번아웃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기생충'을 너무 찍고 싶어서 없는 기세를 영혼까지 긁어모아서 찍고, 촬영 기간보다 더 긴 오스카 여정까지 지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날 여러분과 이야기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끝이 나는구나' 싶다. 옆에 곽신애 대표와 '기생충'을 처음 이야기한 게 2015년 초인데 참 긴 세월이었다. 행복한 마무리가 된 것 같아서 기쁘다"며 만족의 미소를 보였다.
그러면서 봉 감독은 "왜 전 세계 관객들이 '기생충'을 좋아했느냐는 시간을 두고 분석해야 하는데, 그건 저의 업무가 아닌 것 같다"며 "기자, 평론가, 관객분들이 평가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저는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한줄 한줄 써나가는 게 이 영화 산업을 위한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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