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배상·충당금 시점 두고 금감원·은행 신경전

[더팩트ㅣ이선영 기자] 홍콩 H지수 연계 ELS 불완전판매에 대한 은행권의 2조원대 과징금·과태료를 두고 금감원 제재심이 오늘 첫 문을 열었다. 다만 사안의 복잡성과 제재 규모를 감안할 때 한 번에 결론이 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은행들은 자율배상 실적을 내세워 과징금 감경과 충당금 인식 시점 조정에 사활을 거는 분위기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이날 오후 홍콩 H지수 ELS 불완전판매를 안건으로 제재심을 열고 KB국민·신한·하나·NH농협·SC제일은행 등 5개 은행에 대한 과징금·과태료 부과 적정성을 심의한다. 금감원은 지난달 말 이들 은행에 총 2조원 규모의 과징금·과태료를 사전 통지했으며, 이는 2021년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 이후 첫 '조 단위' 과징금이자 역대 최대 수준이다.
이번 과징금이 '역대급'으로 불리는 이유는 금감원이 과징금 산정 기준을 '수수료 수입'이 아니라 '판매금액'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금융소비자보호법은 위법 행위로 얻은 수입 또는 이에 준하는 금액의 50% 이내에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당국은 소비자 피해 규모와 제재 실효성을 감안해 판매금액을 수입에 준하는 금액으로 해석했다는 입장이다.
홍콩 H지수 ELS 판매액은 KB국민은행 8조1972억원, 신한은행 2조3701억원, NH농협은행 2조1310억원, 하나은행 2조1183억원, SC제일은행 1조2427억원, 우리은행 413억원 수준으로 집계된다. 우리은행은 판매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어 이번 과징금 사전통지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금감원은 은행들이 홍콩 H지수 ELS를 팔면서 투자자 성향과 상품 위험도를 제대로 맞추지 않았고, 서류 작성·녹취 등 판매 절차를 형식적으로 처리하거나 본점 차원에서 고위험 상품 판매 실적을 과도하게 독려한 정황이 있다고 보고 있다. 단순히 개별 직원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적인 불완전판매에 해당하는 만큼, 대규모 과징금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당국의 기본 인식이다.
은행들은 제재심에서 과징금 규모를 낮추기 위한 '방어 논리'에 집중할 계획이다. KB국민·신한·하나·NH농협·SC제일은행은 홍콩 ELS 손실 투자자를 대상으로 자율배상을 진행해 왔고, 지난해까지 자율배상액은 총 1조3437억원, 합의율은 90% 중후반 수준으로 추산된다. 은행별로는 KB국민은행 6959억원, NH농협은행 2527억원, 신한은행 1865억원, 하나은행 1093억원, SC제일은행 993억원 등이다.

은행권은 이미 막대한 배상을 집행하고 내부통제와 상품 판매 체계를 손봤다는 점을 강조해 과징금 감경 사유로 인정받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지난달 금융위원회가 의결한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감독규정 개정안'을 근거로 한다. 이번 개정안에는 위법성에 비례해 과징금을 줄일 수 있는 감경 사유가 새로 담겼기 때문이다. △소비자보호 실태평가 결과가 우수한 경우(30% 이내) △금소법상 소비자보호 기준 등을 충실하게 마련하고 이행한 경우(50% 이내) △금융사고 이후 적극적인 피해 배상이나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노력(50% 이내) 등이다. 2가지 사유가 동시에 충족되면 최대 75%까지 감액 받을 수 있다.
다만 한 차례 제재심으로 최종 결론이 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DLF(파생결합펀드) 사태 때처럼 대심제 방식의 공방이 이어질 경우 제재심이 서너 차례 이상 열릴 수 있고, 이후 증권선물위원회와 금융위원회 정례회의 의결까지 거쳐야 해 과징금·과태료 규모가 확정되는 시점은 내년 1분기 이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행정제재 제척기간(통상 5년)을 감안하면 늦어도 내년 3월 전에는 결론이 날 것으로 전망된다.
은행들이 특히 신경 쓰는 부분은 과징금이 실적과 자본비율에 미칠 영향이다. 국제회계기준(IFRS)상 과징금과 같은 우발 손실은 '발생 가능성이 높고 금액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을 때' 충당부채로 인식해야 한다. 사전 통지로 기본 금액의 윤곽이 드러난 만큼, 연말 결산(올 4분기 실적)에 어느 정도의 충당금을 반영할지, 아니면 제재심·금융위 의결 이후 내년 1분기 실적부터 본격적으로 반영할지를 두고 은행들의 셈법이 복잡해진 상태다.
자본 규제 측면의 부담도 만만치 않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금융회사가 과징금을 부과받으면 해당 금액의 약 600%를 10년간 운영리스크로 추가 인식해야 해, 위험가중자산(RWA)이 늘어나고 보통주자본비율(CET1)이 떨어진다. 2조원 규모 과징금이 그대로 확정될 경우 단순 추산만으로도 약 12조원의 RWA가 늘어나 금융지주들의 CET1이 1%포인트 안팎 하락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대해 금감원은 과징금 제재 기조는 유지하되 자본 규제 부담은 완화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이찬진 금감원장은 최근 간담회에서 "금융위원회와 협의해 은행들의 생산적 금융 집행에 장애가 없도록 과징금의 RWA 반영 시점을 유예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도 "홍콩 ELS와 같은 대규모 소비자 피해에 대해선 엄정한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했다. 과징금 총액과 감경 폭, RWA 반영 방식 등을 놓고 감독당국과 은행권의 신경전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은행권 관계자는 "한 번의 제재심으로 끝나기보다 최소 두세 차례 추가 심의와 금융위 의결까지 거치는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며 "결국 관건은 최종 과징금 규모와 충당금·RWA 반영 방식인데, 자율배상과 재발방지 노력이 어느 정도 감안되느냐에 따라 은행별 희비가 크게 갈릴 수 있다"고 말했다.
-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 이메일: jebo@tf.co.kr
-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