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에서는 신용보험제도 적극 활용
금융기관 규제에 묶여 못 팔아
금융소비자보호법 개정 관건
[더팩트ㅣ이선영 기자] 집주인이 사망하며 세입자들이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빌라왕' 사례 등 전세사기피해를 줄일 해결책으로 대출자에 대한 '신용보험' 의무 가입이 거론되고 있다. 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취급 보험사도 최근 늘고 있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금융기관이 대출 상품을 팔 때 신용보험을 함께 판매하는 것이 불가능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30일 보험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BNP파리바카디프생명의 신용생명보험 신계약 건수는 4만985건으로 2년 전인 2020년(4918건) 대비 10배 가까이 급증했다. BNP파리바카디프생명은 신한은행과 함께 지난해부터 새희망홀씨대출 이용자를 대상으로 신용생명보험인 '신한은행대출 안심플랜'을 무료로 서비스하고 있다. 최근 신용생명보험을 출시한 KB라이프생명은 KB국민은행과 제휴해 가계신용대출을 받은 신규 고객을 대상으로 'KB신용생명보험 부가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신용보험은 차주에게 상해사망·후유장애·중대질병 등이 발생해 상환 능력이 상실된 경우 보험사가 보험 가입 금액을 대출기관에 지급하는 보험이다. 생명보험사가 판매하면 신용생명보험, 손해보험사가 판매하면 신용손해보험이라고 부른다. 또한 보험사와 계약을 맺은 상대가 차주 본인인지 대출기관인지에 따라 개인신용보험과 단체신용보험으로 구분된다.
최근 '빌라왕' 사례 등 전세사기피해를 줄일 해결책으로 떠오른 것은 단체신용보험이다. 빌라왕 사태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보험이 가입돼 있었음에도 집주인인 빌라왕이 사망함으로써 구상권을 청구할 대상이 사라진 보증기관이 보증금 반환을 지연시키면서 임차인들이 이사도 가지 못하고 보증금도 반환받지 못한 사건이다.
금융권에서는 집주인이 대출받을 때 보험사와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단체신용보험 계약을 맺으면 '빌라왕' 사태 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집주인이 사망했을 때 HUG가 보험사에서 보험금을 받아 세입자에게 지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세입자가 전세금반환 보증보험에 가입했더라도 돈을 돌려받기 힘들다. HUG와 같은 보증기관이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먼저 지급하려면 구상권을 청구할 상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사망하면 계약해지와 구상권 청구가 모두 어려워진다.
전세사기 외에도 신용보험은 극심한 가계부채 문제 해결을 위해 국내에서 활발히 활용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빚을 남기고 사망한 차주 대신 보험사가 상환해 줌으로써 가족들이 빚의 대물림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프랑스·미국·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신용보험이 활성화된 상태다. 특히 일본의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의무적으로 신용보험에 가입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2002년 BNP파리바카디프생명이 한국 진출과 함께 신용보험을 처음 선보인 후 20여 년이 지나도록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신용생명보험의 연간 수입보험료는 5억 원 미만으로 전체 수입보험료의 0.0005% 수준이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신용생명보험이 활성화된 미국의 가계부채와 연 수입보험료로 비교했을 때 국내 시장에서는 수입보험료 기준 연간 1800억 원가량의 잠재수요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은행 등 금융회사가 대출해 줄 때 보험 등 다른 금융상품을 같이 판매하면 일명 '꺾기(행원이 대출을 대가로 예금·보험 가입 등을 권유하는 행위)'로 불리는 불공정 영업 행위로 처벌받을 여지가 있다. 이에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인 최승재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7일 신용보험 판매 규제를 완화하는 '금융소비자 보호법'을 발의했다. 개정안은 금융기관에서 대출 상품을 팔 때 신용보험을 함께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앞서 2019년과 2021년 비슷한 개정안이 두 건 발의됐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보험 업계 관계자는 "신용보험이 선진국에서는 이미 활성화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인지도가 낮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며 "관련 법 개정을 통해 대출창구에서 가입 권유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국회 정무위원회의 금융위원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금리 인상기 신용생명보험 도입 필요성에 대해 공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2월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서 별도의 정책적 지원이 없을 경우 자영업자 등 취약차주의 비중 확대와 대출 부실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언급해 신용생명보험이 재조명을 받기도 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제도적, 금융소비자의 인식적인 측면에서 개선돼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보고 있다. 또 현재 이 상품이 주로 무료 행사를 통해 금융소비자의 호응을 얻기 시작해 은행이 보험료를 부담하는 단체보험이 도입해도 보험료가 대출 금리에 포함된 것으로 해석될 경우 다른 형태의 불공정영업행위로 간주할 수 있고 소비자의 불만이 제기될 수 있다. 현재 신용생명보험의 보장 범위가 사망과 일부 특정 질병 등에 한정돼 있고 정기보험과의 차별성도 부족하다는 점 역시 한계로 지적된다.
일각에서는 신용보험의 활성화가 금융 소비자의 보험료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신용보험이 활성화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면서도 "전세와 관련된 신용보증보험 형태로 유지하려고 하면 보험료가 높아질 개연성이 있다. 높은 보증료로 서민 부담이 커지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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