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의 최우선 가치도 '돈을 버는 것'을 넘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경영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요 그룹은 경제적 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바꾸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주요 그룹의 이런 노력은 아직 일반인에게 생소한 편이다. '반도체' 세계 1위 기업 삼성이 다문화 여성을 대상으로 커피 제조 전문가 바리스타 육성 교육을,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로 나선 현대자동차가 지역 특산물 판매와 유통을, 통신업계 '맏형' SK가 산림을 가꾸고 나무를 심는 조림사업을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에 따라 <더팩트>는 국내 주요 그룹 '이색 계열사'를 살펴보고 왜 이런 기업을 운영하는지에 대한 역사와 배경을 시리즈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장애인 고용 확대·업무 개발 '앞장'…고 구본무 전 회장 경영 철학 담긴 사업장
[더팩트ㅣ안양=이성락 기자] 청각 장애인 이혜진(42·여) 씨는 5년 전부터 경기도 안양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하는 일은 사기성 휴대전화 판매 영업을 막는 업무다. 주로 회사 내에서 통화 이력 등 여러 데이터를 수집해 모니터링하는 일을 한다.
휴대전화를 대량 개통해 판매수수료를 챙기는 사기 판매 영업은 통신 회사에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고객의 명의도용 가능성 또한 크다. 이를 방지하는 혜진 씨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힘이 들 때도 있지만 다행히 혜진 씨는 이 일이 적성에 잘 맞는다고 한다. 회사 차원의 배려까지 더해져 업무 만족도도 높은 편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일반 사무직에서 일할 기회를 얻지 못했어요.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만족스럽습니다. 회사가 장애인 표준사업장이다 보니 장애인에 대한 편견 없이 많이 이해해주기 때문에 더 좋고요."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혜진 씨 일터는 '위드유(with you)'라는 회사다. LG그룹의 통신 계열사 LG유플러스가 지난 2013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설립한 자회사형 장애인 표준사업장이다. '너와 함께'라는 회사명에서 나타나듯 회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동등한 환경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업무는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적성에 따라 나누고 업무 평가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동일하게 이뤄진다. '위드유'는 몸이 불편한 사람도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인 셈이다.
자회사형 장애인 표준사업장은 장애인 고용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회사를 말한다. '위드유' 역시 장애인 의무고용률(2.9%)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LG유플러스가 100% 출자해 설립했다. 정부는 LG유플러스와 같은 모회사가 장애인 고용을 목적으로 자회사를 설립하면 자회사에서 고용한 장애인을 모회사에서 고용한 것으로 인정한다. 자회사를 통해 고용을 확대한 모회사는 장애인 고용부담금 감면 혜택을 받는다.
하지만 '위드유' 운영을 고용부담금 감면 혜택 차원으로만 설명할 순 없다. 장애인 일자리를 늘려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모회사 의지가 없다면 결코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산총액 10조 원 이상 대기업 중에서 LG를 포함해 삼성·SK·롯데·포스코·효성 등 단 6곳만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 LG유플러스 등 다양한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는 LG그룹이 가장 적극적이다. '위드유'를 포함해 2012년부터 지금까지 11개 계열사에서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사실상 그룹 전체가 움직였다. 이같은 결정에 그룹 회장의 의중이 반영되지 않았을 리 없다. 생전 누구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던 고(故)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의 이야기다.
◆ '하루 1000건의 편견'과 맞서다
"그렇게 이색적이랄 게 없죠?" 지난 20일 만난 장광국(55) '위드유' 대표가 말했다. 실제로 장애인 표준사업장이라고 해서 일반 회사 사무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위드유'는 이색적인 것을 거부하는 회사였다. 보통과 다를 것이라는 편견, 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과 맞서는 중이었다.
장 대표는 "'위드유'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나누지 않고 이들이 함께 섞여 일하는 회사"라며 "과거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장애인 업무 능력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메신저를 통한 소통이 가능해 업무를 진행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현재 '위드유'에는 207명이 일하고 있다. 정규직·계약직 포함 장애인 직원은 95명으로 이 가운데 중증장애인이 75명이다. 대부분 혜진 씨와 같은 청각장애인이다. 이들은 사기 영업(이상 영업) 감시 외에도 ▲모바일 가입서류 검수 ▲결합상품 검수 ▲불량·중고 단말기 검수 ▲개통해피콜 ▲사은품 지원 문의 등 LG유플러스의 서비스 품질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가입서류 검수 업무만 놓고 보면 직원 1명이 하루에 1000건을 처리한다. 이는 몸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도 해내기 쉽지 않은 업무량이라는 것이 장 대표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장애인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위드유' 소속 장애인 직원들은 이러한 편견을 1000건의 가입서류를 검토하는 일을 통해 매일 깨뜨리고 있다. 물론 의사소통에 제약이 있는 직원은 업무를 습득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기다려주는 것이 바로 장애인 표준사업장의 역할이다. 전화 상담이 필요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직원이 서로 협력해 일을 처리한다.
LG유플러스에 업무를 위탁받아 수수료를 챙기는 '위드유'의 매출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매출은 33억6000만 원이다. 연말까지 69억 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위드유'에서 매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장애인 고용 직원 수다. 표준사업장의 존재 목적이 장애인 고용 확대이기 때문이다. '위드유'의 장애인 직원은 2016년 38명에서 지난해 57명, 올해 95명으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내년에는 장애인 직원이 113명(고용률 3.1% 예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장애인 고용에 따른 고용부담금 혜택은 덤이다. 올해 약 20억 원의 고용부담금 절감이 예상된다.
◆ '위드유'의 든든한 지원군 'LG그룹'
'위드유'의 노력은 장애인 고용을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단순 업무를 넘어 구성원이 적성에 맞는 업무를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에도 주력하고 있다. 장 대표는 "'위드유'를 통해 직원들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위드유'는 모바일 가입신청서를 검수하는 일 하나를 맡으며 탄생했다. 이후 중고 단말기 등급 판정 및 알뜰폰 가입 등 검수 업무를 늘렸고 상담 지원 업무에도 발을 들였다. 지난해에는 안양과 서울 시흥에서 클리닝 서비스를 시작했다. 또 시흥과 부산 감전 센터에 카페를 개설해 장애인 고용을 대폭 늘렸다. 올해는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와 상암 사옥, 부산 중앙 센터 내에 사내 카페를 새롭게 열었다. '위드유'는 내년 서울 용산 사옥에 카페를 추가 개설해 장애인 직원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위드유' 카페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직원들은 바리스타(커피전문가)라는 꿈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발달 장애가 있는 박진주(21·여) 씨도 바리스타가 되고 싶어 '위드유'에 취업했다. 그는 현재 '위드유' 마곡 LG사이언스파크점에서 장애인 동료 17명과 함께 근무하고 있다. 진주 씨는 "단순 사무 업무보다 카페에서 일하는 게 더 적성에 맞았다"며 "열심히 일해 서른 살 때 개인적으로 카페를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처럼 '위드유'가 장애인의 고용 확대·업무 개발 등을 적극 추진할 수 있었던 데는 LG유플러스의 지원이 있다. 모든 업무가 본사와 연계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하나 주도적으로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에서 모회사인 LG유플러스가 '위드유'만의 행보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지난달 최고경영자(CEO)로 선임된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은 '위드유' 안양 센터를 찾아 장 대표와 만나 "장애인 직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근로 여건을 계속 개선해나가 달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LG그룹의 경영 철학도 '위드유' 운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위드유'라는 장애인 표준사업장 설립 자체가 고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 경영 당시 그룹 차원의 결정으로 이뤄졌다. 표준사업장을 늘려 장애인 고용을 확대하겠다는 그룹의 결정 아래 지난 2012년 LG디스플레이가 장애인 표준사업장 '나눔누리'를 처음 설립했고, 1년 뒤 LG유플러스가 동참하면서 '위드유'가 탄생했다. 장 대표는 "표준사업장 설립은 CEO 의지가 없으면 이뤄질 수 없다"며 "'위드유'가 일정 규모의 회사로 빠르게 정착하는 데에도 그룹 차원의 지원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 '위드유'는 오늘도 '위드유'를 외친다
구 전 회장은 'LG의인상'과 독립유공자 후원 등을 통해 누구보다 사회 공헌 활동을 적극 추진한 그룹 총수였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이를 실천하는 데 앞장서는 남다른 경영 철학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경영 철학을 토대로 현재 LG그룹은 가장 적극적으로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운영하는 기업이 됐다. 현재 LG는 계열사를 통해 '위드유'를 포함해 ▲'나눔누리'(LG디스플레이) ▲'이노위드'(LG이노텍) ▲'행복누리'(LG화학) ▲'하누리'(LG전자) ▲'사랑누리'(LG생명과학) ▲'밝은누리'(LG생활건강) ▲'행복마루'(LG CNS) ▲'드림누리'(서브원) ▲'그린누리'(LG하우시스) ▲'한울타리'(판토스) 등 총 11개의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LG 외 다른 그룹에서는 장애인 표준사업장 설립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현재 대기업 집단(공정거래법상 자산총액 10조 원 이상) 30여 곳 중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설립한 기업은 LG를 포함해 삼성·SK·롯데·포스코·효성 등 6곳뿐이다. 계열사로 나누면 회사 18곳에서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지사 별로 관할 내 기업들에 장애인 표준사업장 설립을 권유하고 있다. 지방고용노동청과 함께 장애인 표준사업장 관련 홍보 자료를 배포하고 기업 임원들을 초청,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쉽게도 기업들의 호응은 그리 크지 않다.
현재 민간기업의 장애인 고용률은 2.64%(지난해 말 기준)로 고용 의무 이행 비율은 45% 수준이다. 특히 규모가 큰 1000인 이상 기업의 이행 비율은 23.9%에 불과하다. 공단은 단순히 고용률을 늘리는 것 외에도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기업의 장애인 표준사업장 설립 필요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공단 관계자는 "장애인 일자리를 늘리는 것만큼 괜찮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대기업이 나서서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설립하면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곳에 취업한 장애인의 근속 기간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LG그룹은 대기업의 장애인 표준사업장 확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장애인 고용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공단 입장에서는 11개의 표준사업장을 만들어 장애인을 고용하고 있는 LG그룹의 행보가 한편으론 고맙다. 공단 관계자는 "LG그룹의 자회사형 장애인 표준사업장 설립을 보고 다른 기업들도 조금씩 장애인 고용을 늘려나가는 추세"라고 밝혔다.
대기업이 자회사형 장애인 표준사업장 설립에 소극적인 이유와 관련해 '위드유' 장 대표는 이것 또한 '편견'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장애인은 업무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장 대표는 다른 기업들에 '위드유'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실제로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운영해 보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충분히 지울 수 있으니 "함께 해보자"라는 제안이다. 그는 "LG를 포함해 대기업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장애인 고용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다 같이 장애인 고용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상당 부분 개선될 여지가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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