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CT

검색
칼럼
'안세영 천하'의 진짜 비밀...44연승을 만든 포기하지 않는 힘 [박순규의 창]
덴마크 오픈 2연패·시즌 61승1패·승률 98.4%…세계 최강의 경이로운 질주
3게임 5-10 열세 뒤집은 불굴의 정신력 '귀감'


166주째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한국의 안세영은 18일 야마구치 아카네와 덴마크 여자오픈 결승전에서 1시간 19분 혈투 끝에 2-1 역전승을 거두고 파죽의 44연승으로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AP.뉴시스
166주째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한국의 안세영은 18일 야마구치 아카네와 덴마크 여자오픈 결승전에서 1시간 19분 혈투 끝에 2-1 역전승을 거두고 파죽의 44연승으로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AP.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세계 최고의 선수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타고난 재능일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술일까, 아니면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한 체력일까. 모두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세계 정상에 오르는 것과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지막 순간 승패를 가르는 것은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힘인지도 모른다.

세계 여자 배드민턴을 지배하고 있는 안세영(24·삼성생명)이 그 답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44연승. 시즌 61승 1패. 승률 98.4%. 시즌 9번째 우승이자 덴마크 오픈 2연패. 숫자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는 경이로운 성적이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즐비한 여자단식 무대에서 62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한 번밖에 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안세영 천하'의 진짜 비밀은 화려한 기록에만 있지 않다. 상대보다 뛰어난 기술을 갖춘 선수는 많다. 강력한 스매시를 구사하는 선수도, 빠른 발과 정교한 네트 플레이를 자랑하는 선수도 있다. 하지만 승리가 멀어지는 순간에도 끝까지 버티고, 무너질 것 같은 위기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선수는 흔치 않다.

안세영의 위대함은 지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질 것 같은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안세영의 위대함은 지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질 것 같은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덴마크 여자오픈 결승전에서 3게임 5-10의 점수 차를 뒤집고 우승한 안세영./뉴시스
안세영의 위대함은 지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질 것 같은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덴마크 여자오픈 결승전에서 3게임 5-10의 점수 차를 뒤집고 우승한 안세영./뉴시스

18일(한국시간) 덴마크 오덴세에서 열린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투어 슈퍼 750 덴마크 오픈 여자단식 결승전은 그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무대였다. 상대는 일본의 야마구치 아카네(세계 3위). 수많은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다퉈온 숙적이다. 최근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안세영에게 완패했던 야마구치는 이번만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기 초반부터 과감한 공격과 정교한 코스 공략으로 세계 1위를 흔들었다.

첫 게임은 야마구치의 몫이었다. 안세영은 18-16으로 앞서다가 역전을 허용하며 21-23으로 게임을 내줬다. 이번 대회 들어 처음으로 빼앗긴 게임이었다. 두 번째 게임에서도 중반까지 팽팽한 공방이 이어졌지만 안세영은 특유의 수비력을 되살리며 8연속 득점으로 승기를 잡았다. 21-14. 승부는 마지막 게임으로 향했다.

진짜 드라마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3게임 중반 안세영은 5-10까지 밀렸다. 오른발 아킬레스건 부위의 통증까지 겹쳤다. 점수도, 몸 상태도 불리했다. 43연승에서 대기록이 멈추는 듯했다. 야마구치는 오랜 연패의 사슬을 끊을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안세영은 무너지지 않았다.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고 또 받아냈다. 강력한 스매시가 날아와도 몸을 던져 셔틀콕을 살렸다. 한 걸음 더 뛰고, 한 번 더 받아내고, 마지막까지 상대의 실수를 기다렸다. 38차례의 샷이 오간 긴 랠리 끝에 12-12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13-12 역전. 점수뿐 아니라 승부를 지배하던 심리적 흐름까지 바뀌었다.

안세영은 결국 마지막 게임을 21-18로 마무리했다. 1시간 19분의 혈투 끝에 거둔 2-1(21-23, 21-14, 21-18) 역전승이었다.

안세영의 44연승은 44번의 쉬운 승리가 아니었다./AP.뉴시스
안세영의 44연승은 44번의 쉬운 승리가 아니었다./AP.뉴시스

◆ 44연승은 44번의 쉬운 승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연승 기록을 숫자로 기억한다. 10연승, 20연승, 30연승. 기록이 늘어날수록 승리는 당연한 결과처럼 여겨진다. 안세영이 이기면 예상대로이고, 한 번이라도 패하면 이변이 되는 것이 세계 1위의 숙명이다.

하지만 44연승은 결코 44번의 쉬운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부상의 고통도, 체력의 한계도, 승리에 대한 중압감도 있었다.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는 곧 모든 경기에서 이겨야 한다는 부담으로 돌아온다. 상대 선수들은 안세영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전술을 연구하고 약점을 파고든다. 어제 통했던 공격이 오늘은 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안세영은 이겼다. 압도적인 기량으로 상대를 제압한 날도 있었지만,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을 끝내 뒤집은 날도 있었다.

중국 고전 '도덕경'에는 '천리지행 시어족하(千里之行 始於足下)'라는 구절이 있다. 천 리 길도 발아래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안세영의 44연승도 마찬가지다. 기록은 거창하지만 그것을 만든 과정은 지극히 소박하다. 눈앞에 떨어지는 셔틀콕 하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 이미 놓쳤다고 생각한 공을 향해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것, 실패한 다음에도 다시 라켓을 드는 것이다.

44연승이라는 거대한 탑은 44개의 우승 장면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한 번 더'의 순간으로 쌓아 올린 결과물이다.

2026 아시안게임에 이어 덴마크 여자오픈 결승에서도 안세영의 벽을 넘지 못한 일본의 야마구치 아카네(왼쪽)./뉴시스
2026 아시안게임에 이어 덴마크 여자오픈 결승에서도 안세영의 벽을 넘지 못한 일본의 야마구치 아카네(왼쪽)./뉴시스

◆ 세계 최고의 수비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완성된다

안세영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수비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게 공격해도 좀처럼 셔틀콕이 코트에 떨어지지 않는다. 공격했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공이 넘어오고, 끝났다고 판단한 랠리가 계속된다.

이 수비는 단순한 방어가 아니다. 상대 공격의 속도를 조절하고, 코스를 바꾸고, 랠리의 길이를 늘리면서 상대의 체력과 집중력을 소모시키는 능동적인 전술이다. 기술적으로는 빠른 풋워크와 정확한 예측, 정교한 라켓 컨트롤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체력이 바닥나고 다리가 무거워지는 순간에도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려면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야마구치와의 결승전이 그랬다. 마지막 게임에서 10-5로 앞서던 야마구치는 분명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안세영이 끈질기게 랠리를 이어가자 흐름이 달라졌다.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야마구치는 점차 지쳐갔다.

반면 안세영은 위기에서 오히려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점수 차가 벌어져도 서두르지 않았다. 당장의 1점에 집착하기보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수비와 랠리로 돌아갔다.

그것이 안세영의 진정한 경쟁력이다. 위기의 순간 새로운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수천 번 반복해온 자신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능력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추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발휘하는 일이다.

◆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어려운 정상에 머무는 일

안세영은 지난달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도 야마구치를 꺾고 여자단식 사상 최초의 2연패를 달성했다. 당시에는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덴마크에서는 달랐다. 패배 직전의 위기를 이겨내야 했다.

두 경기는 승리라는 결과는 같았지만 과정은 전혀 달랐다. 완승이 선수의 기술적 우위를 보여줬다면 역전승은 정신적 강인함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안세영 천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스포츠 역사에는 눈부신 재능으로 정상에 오른 천재들이 많다. 그러나 재능만으로 오랫동안 정상에 머문 선수는 드물다. 상대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몸은 지치며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결국 오랫동안 정상을 지키는 선수는 자신의 재능을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매일 자신을 새롭게 단련하는 사람이다. 안세영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랭킹 1위라는 이름이 내일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44번을 연속으로 이겼다고 해서 45번째 승리가 저절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가 끝없이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듯, 안세영은 매번 새로운 경기를 앞두고 다시 출발선에 선다. 어제의 영광은 오늘의 셔틀콕을 대신 받아주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집중력과 투혼만이 다음 승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세계 1위의 고독이자 위대함이다.

◆ 안세영이 보여준 것은 승리보다 위대한 삶의 태도

스포츠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누가 이기고 지는지를 보여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선수들이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5-10으로 뒤지는 순간을 만난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고, 몸과 마음이 지쳐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도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재능이나 특별한 비법이 아닐 수 있다.

눈앞의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용기, 할 수 있는 일을 마지막까지 해내는 인내,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믿음이다. 안세영은 덴마크에서 바로 그 사실을 보여줬다.

그의 우승이 더욱 값진 것은 통증을 참고 경기를 마쳤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자신이 쌓아온 기본과 원칙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고통을 무조건 참는 것이 미덕일 수는 없지만, 흔들리는 순간에도 자신의 경기를 잃지 않는 태도는 분명 배울 만하다.

44연승, 61승 1패, 승률 98.4%. 시간이 흐르면 이 기록도 언젠가는 깨질 수 있다. 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선수가 나타날 수도 있고, 안세영 역시 패배를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덴마크 오픈 결승전 3게임 5-10의 순간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모두가 위기를 말할 때 안세영은 다시 뛰었고, 승리가 멀어 보일 때도 라켓을 놓지 않았다.

그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역전승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였다.

이길 수 있어서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았기에 이길 수 있었다.

' 안세영 천하'의 진짜 비밀은 여기에 있다. 천재적인 재능이 세계 최고의 선수를 만들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힘은 그를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안세영의 44연승은 단순한 스포츠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재능의 승리이면서 노력의 승리이고, 무엇보다 꺾이지 않는 마음의 승리다.

2026 아시안게임에 이어 덴마크 여자오픈 결승에서도 안세영의 벽을 넘지 못한 일본의 야마구치 아카네(왼쪽)./뉴시스


skp2002@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인기기사
회사소개 로그인 PC화면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