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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만의 신기록’도 못본 안방… 이게 ‘보편적 시청권’인가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지상파 3사·종편 등 여러 채널이 중계권을 나눠 가진 아시안게임
시청자에게 돌아온 것은 다양한 ‘선택’ 아닌 획일화였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여자 400m 결승에서 53초 38의 기록으로 한국신기록을 작성한 김서윤(창원시청) 선수의 코너 주행모습. / 대한육상연맹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여자 400m 결승에서 53초 38의 기록으로 한국신기록을 작성한 김서윤(창원시청) 선수의 코너 주행모습. / 대한육상연맹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23년 만의 한국 신기록’이라는 역사적 순간이 안방극장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지난 26일 저녁,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여자 400m 결승에 나선 김서윤(23·창원시청)은 53초 38을 기록하며 2003년 이후 그 누구도 깨지 못했던 한국 육상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러나 안방에서 리모컨을 쥐고 있던 시청자들은 이 감동적인 레이스를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없었다. 아시안게임 중계권을 지닌 지상파 3사(KBS·MBC·SBS)와 TV조선은 물론 SPOTV까지, 같은 시간대에 한국-중국 야구 또는 일본-대만 야구를 중계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인기 종목 편중 편성’ 이상의 씁쓸함을 남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방송사들이 목소리 높여 외쳤던 명분과 정반대의 행태를 스스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난 동계올림픽과 월드컵 중계권 협상 과정에서 지상파 3사는 특정 방송사의 독점 중계를 비판하며 "국민의 알권리와 기본권이 침해당한다", "보편적 시청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웠고, 결국 법 개정 논의까지 이끌어냈다. 공영방송과 대형 방송사들이 국민의 보편적 시청권을 지키는 수호자인 것처럼 굴었던 이유다.

그러나 정작 지상파 3사와 TV조선까지 중계권을 나누어 가진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그들이 보여준 현실은 어떤가. 4개 방송사가 서로 다른 종목을 다채롭게 보여주며 시청자의 선택권을 넓히기는커녕, 모두가 시청률이 높은 야구 한 경기에 몰리면서 채널을 나눠 가진 의미를 스스로 퇴색시켰다. 시청자들에게 제공된 것은 ‘선택의 다양성’이 아니라 ‘동일 종목 강제 시청’이었다. 그나마 SPOTV가 일반 방송에서 중계하지 않는 종목을 편성하고 있으나 이날 역시 한국-중국 야구가 아닌 일본-대만전 야구 중계를 편성했을 뿐이다.

아시안게임 야구 슈퍼라운드 최종전 한국-중국전 경기 장면/ MBC 중계화면 캡처
아시안게임 야구 슈퍼라운드 최종전 한국-중국전 경기 장면/ MBC 중계화면 캡처

이러한 파행 속에서 피해를 입는 것은 시청자와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다. 지상파는 전날(25일) 남자 100m 결승에 나선 나마디 조엘진과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의 레이스는 비중 있게 생중계했다. 대중적 관심이 높은 종목에는 카메라를 대고,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은 여자 400m 결선은 외면했다. 김서윤이라는 '신성'이 23년 만의 통곡의 벽을 무너뜨리며 아시아 4위라는 대역사를 써 내려가는 동안, 시청자들은 지상파와 종편을 아무리 돌려도 야구 중계 화면밖에 볼 수 없었다. 그나마 채널이 두개인 KBS의 경우 KBS1에서 한국과 일본의 여자농구 결승을 중계해 한국의 12년만의 우승 장면을 국민들과 함께 한 것은 다행이다.

이번 대회 초반 한국 육상 트랙종목이 전한 가장 강렬한 장면은 조엘진과 비웨사의 남자 100m 결승 4·5위 선전과 김서윤의 기록 경신이다. 일찍이 한국 단거리의 간판으로 화제를 모아온 이들 남자 100m 주자들과 달리, 김서윤은 올 들어 기록이 크게 단축되며 한국 여자 400m의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주변에서도 그의 기록이 머지않아 한국신기록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기대했지만,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개인 최고기록을 넘어 23년 묵은 한국기록까지 갈아치울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김서윤은 26일 여자 400m 결승에서 53초 38의 기록으로 4위를 차지했다. 동메달과는 불과 0.17초 차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기록이었다. 2003년 이윤경이 세운 53초 67 이후 무려 23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한국기록을 0.29초나 단축했다. 국제무대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한국 여자 400m에서 아시아 정상권과 경쟁할 가능성을 보여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감동적인 레이스를 많은 시청자들은 실시간으로 지켜보지 못한 채 뒤늦게 보도를 통해 접했고, 온라인에 올라온 영상을 찾아봐야 했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 한국여자 육상대표 선수로 참가하고 있는 김서윤 선수./ 대한육상연맹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 한국여자 육상대표 선수로 참가하고 있는 김서윤 선수./ 대한육상연맹

방송사들이 그동안 내세워온 ‘보편적 시청권’의 취지가 시청률이 높은 인기 종목을 모든 채널이 똑같이 중계하는 데 있을 리 없다. 여러 채널이 중계권을 나눠 가졌다면, 그만큼 다양한 종목을 접할 수 있는 시청자의 선택권도 넓어져야 한다. 그것이 국민이 국가대표 선수들의 피땀 어린 도전을 다양한 종목에 걸쳐 고루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채널 선택의 권리’이자 ‘알권리’다.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일 때는 ‘보편적 시청권’을 전면에 내세우고, 정작 중계권을 손에 쥔 뒤에는 여러 방송 채널이 같은 종목에 몰려 국민의 선택권을 좁혀버린 행태는 지독한 자가당착이다.

대회 후반부에는 28일 400m 남녀 계주를 비롯해 중거리 간판 이재웅이 나서는 남자 1500m와 장거리 기대주 박재우의 5000m·10000m 등 한국 육상의 기대주들이 출전하는 주요 레이스가 이어진다. 방송사들은 지금이라도 이번 편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중계권을 나눠 가진 만큼 시청자들이 다양한 종목을 접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취지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김서윤의 23년 만의 한국 신기록 레이스가 방송에서 사라진 이번 장면은, 스포츠 중계에서 방송사의 역할과 ‘보편적 시청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 한국여자 육상대표 선수로 참가하고 있는 김서윤 선수./ 대한육상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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