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 파퀴아오 이후 최고의 세계적 스타
라켓 판매, 코트 예약, 어린이들 꿈도 바꿨다

[더팩트 | 박호윤 전문기자] 스포츠에서는 가끔 특정 선수의 이름 뒤에 ‘현상’이라는 말이 붙는다. 단순히 경기를 잘하고 우승을 많이 한다고 생기는 수식어가 아니다. 선수 한 명 때문에 사람들이 TV 앞에 모이고, 아이들이 그 종목을 시작하고, 시장과 문화까지 움직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현상’이라 할 만하다.
지금 필리핀의 스물한 살 왼손잡이 알렉산드라 이알라가 그렇다.
#매니 파퀴아오 이후 최고의 필리핀 스포츠 영웅
그의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 US오픈 도전은 3회전에서 멈췄다. 6일 오전(한국시간) 열린 경기서 세계 여자테니스의 또 다른 신성이자 복식 파트너이기도 한 절친 이바 요비치(18 미국)에 3시간 여 풀세트 승부 끝에 아쉽게 졌다. 하지만 전세계 테니스계에 몰아치고 있는 ‘이알라 현상’까지 멈춘 것은 아니다.
이번 US오픈이 열린 뉴욕 플러싱 메도스는 이를 확인하는 무대였다. 이알라가 코트에 들어서면 필리핀 국기가 관중석을 뒤덮고 ‘Laban Alex!(힘내라 알렉스!)’라는 함성이 터졌다. US오픈 홈페이지는 아예 ‘Eala mania’라고 표현했다. 2회전이 열린 1만4000석 규모 루이 암스트롱 스타디움은 필리핀의 홈코트를 방불케 했다. 대회 측은 이알라를 은퇴한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 이후 필리핀의 가장 큰 스포츠 영웅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인기는 경기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 세계를 도는 이알라의 경기 영상과 쇼츠가 유튜브와 SNS를 타고 끊임없이 퍼진다. US오픈을 앞두고는 그의 연습 장면 생중계만 거의 조회수 10만을 기록했다. 다른 정상급 선수들의 연습 영상은 조회수 1만을 넘기기도 쉽지 않다는 비교까지 나왔다. 전 세계 테니스 팬들의 휴대전화 화면에서도 ‘이알라 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US오픈도 일찌감치 이 흥행성을 알아봤다. 본선 개막 전 ‘Stars of the Open’ 이벤트에서 이알라와 열여덟 살 요비치를 아서 애시 스타디움에 세웠다. 세계 여자테니스의 미래를 대표할 젊은 스타들의 시범경기였다. 둘은 아버지들까지 코트에 불러들여 팬들과 즐겼다. (이 시범경기의 유튜브 풀버전은 현재 조회수가 260만회를 넘고 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인 6일, 같은 아서 애시 스타디움에서 이번에는 US오픈 16강 진출을 놓고 진짜 승부를 벌였다. 친구인 두 젊은 스타의 대결 자체가 하나의 흥행 상품이 됐다.
#필리핀은 몸살 중...라켓 판매 급증, 코트는 예약 전쟁
그러나 정작 더 놀라운 현상은 1만km 넘게 떨어진 그의 고국 필리핀에서 벌어지고 있다. 필리핀 데카트론의 초보자용 테니스 라켓 판매는 최근 1년 새 66% 급증했다. 필리핀 내 1000개 안팎의 테니스 코트는 요즘 예약 전쟁 중이다. 부모들은 어린 자녀를 테니스장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아홉 살 소녀는 "커서 이알라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필리핀테니스협회 관계자의 말처럼 이알라는 사람들에게 테니스를 ‘보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윔블던 16강에 올랐을 때는 마닐라 일대에서 단체 응원전까지 펼쳐졌다. 필스포츠 아레나가 무료 관람 장소로 문을 열었고 식당과 술집들도 워치파티를 마련했다. 농구와 복싱에 익숙했던 나라에서 테니스 한 경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알라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신데렐라는 아니다. 네 살 무렵 할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일찌감치 라켓을 잡은 이알라는 열두 살 때 세계적인 14세 이하 대회 ‘르 프티 아’를 제패했고, 2018년 열세 살의 나이에 오빠와 함께 필리핀을 떠나 스페인 마요르카의 라파엘 나달 아카데미로 향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시스템에서 테니스와 학업을 병행하며 성장했다.
2022년에는 US오픈 주니어 여자단식 정상에 올라 필리핀 테니스 역사를 새로 썼다. 하지만 곧바로 스타가 된 것은 아니다. 작은 ITF 대회를 전전하며 500위권, 200위권 등 랭킹을 한 계단씩 끌어올렸다. 지난해 마이애미오픈 4강 진출로 강한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올해 윔블던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이가 시비옹테크를 꺾으며 자신의 메이저 최고 성적인 16강에 올랐다. 이어 WTA500 무바달라 DC오픈에서는 제시카 페굴라를 결승에서 꺾고 필리핀 선수 최초의 WTA투어 단식 챔피언이 됐다. 세계랭킹은 어느새 18위. 이번 US오픈에서도 처음 3회전에 올랐다.
#박세리처럼, '이알라 키즈'들이 꿈틀거린다
골프팬이라면 이 풍경에서 박세리를 떠올릴 만하다. 1998년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을 당시 그는 LPGA투어의 유일한 한국 선수였다. 하지만 새벽 TV로 그의 우승을 지켜본 어린 소녀들이 골프채를 잡았고 훗날 ‘세리 키즈’가 세계 여자골프를 주름잡았다. USGA는 박세리의 성공으로 한국에서 골프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바뀌었다며 이를 ‘롤모델 효과(Role Model Effect)’라고 설명한다. 이후 한국에서 급변모한 골프의 위상은 아는 바와 같다.
필리핀에서는 어쩌면 지금 박세리의 그것 처럼 ‘이알라 키즈’의 첫 세대가 라켓을 휘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알라는 이달 말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 필리핀 대표로 출전한다. 세계 18위까지 올라선 지금은 랭킹 포인트와 상금이 걸린 WTA투어의 대회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아시안게임 기간에는 다른 WTA 대회도 열린다. 그럼에도 이알라는 조국을 택했다. 이알라는 3년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여자단식과 혼합복식 동메달을 딴 바 있다. 필리핀테니스협회 사무총장의 표현은 간단했다.
"She chose to play for the flag."(그녀는 국가를 위해 뛰는 것을 선택했다.)
몇 년 전 KIA 타이거즈 김도영이 '40-40'(홈런 40-도루 40)을 훌쩍 넘기며 국내 프로야구판을 들썩이게 할 때 광주 팬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피켓 문구가 있었다.
"도영아, 니 땜에 살어야."
US오픈 3회전에서 졌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 새벽까지 이알라의 경기를 지켜보고, 세계 곳곳의 경기장을 필리핀 국기로 물들이고, 자녀의 손에 처음 라켓을 쥐여주는 필리핀 사람들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이알라, 니 땜시 산다."
한 선수가 국민의 자부심이 되고, 아이들의 꿈을 바꾸고, 없던 테니스 시장을 키우며 세계의 시선까지 자기 나라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그 선수는 다시 조국의 국기를 위해 뛴다.
US오픈 여정은 멈췄지만 ‘이알라 현상’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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