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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혁 넘어 2000년대생이 뛴다...한국 육상 ‘부흥의 나고야’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전국체전용 종목에서 기록 스포츠로, 세계무대 노크하는 한국 육상의 새로운 전기
2000년대생 주역들이 써 내려가는 부흥 시그널


한달 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남자 육상 400m 계주 대표팀 동료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 서민준, 나마다 조엘진, 김시온(왼쪽부터)이 지난 6일 충청북도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진행한 단체촬영에서 바통을 이어받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진천=대한육상연맹
한달 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남자 육상 400m 계주 대표팀 동료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 서민준, 나마다 조엘진, 김시온(왼쪽부터)이 지난 6일 충청북도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진행한 단체촬영에서 바통을 이어받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진천=대한육상연맹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한국 육상의 역사는 오랫동안 마라톤의 영광과 트랙의 침묵이 공존한 불균형의 역사였다. 1936년 손기정, 1992년 황영조, 1996년 이봉주로 이어진 마라톤의 신화는 국민들에게 짙은 영웅 서사를 안겼지만, 그 화려한 그림자 뒤편에서 트랙과 필드는 깊은 정적에 갇혀 있었다.

‘서구권은 물론 아시아 최정상권의 벽을 넘어서는 것은 어렵다’는 자조적 패배의식이 팽배했고, 육상은 오직 지자체 예산 확보와 전국체전 메달 순위 경쟁을 위한 ‘생계형 스포츠’로 고착화됐다. 순위에 안주하는 사이 세계와의 격차는 벌어졌고, 팬들의 관심마저 꺼져간 긴 암흑기가 이어졌다.

우상혁이 2022 세계실내육상선수권대회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1위를 차지한 뒤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환호하고 있다. / 신화 뉴시스
우상혁이 2022 세계실내육상선수권대회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1위를 차지한 뒤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환호하고 있다. / 신화 뉴시스

◆ 패러다임의 균열: 2021 도쿄에서 시작된 반전의 시그널

이 무거운 정적에 처음으로 균열을 낸 상징적 장면은 2021년 열린 도쿄 올림픽의 우상혁이었다. 거침없는 세레머니와 "할 수 있다"는 당당한 표정으로 2m35를 넘어서며 달성한 전체 4위는 올림픽 한국 육상 트랙·필드 역사상 최고 순위였다. 그의 도약은 단순한 성적을 넘어 한국 육상 전체의 정서적 패러다임을 뒤흔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어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400m 계주(이정태 김국영 이재성 고승환)에서 나온 37년 만의 동메달과 한국 타이기록(38초74)은 한 명의 돌출된 재능을 넘어, 한국 단거리 육상에 변화의 가능성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나마디 조엘진(20·단거리),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23·단거리), 박시훈(19·투포환), 김태희(20·해머던지기) 등 트랙과 필드에서 2000년대생 차세대 주자들이 잇따라 등장하며 한국 육상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한국투척의 간판 박시후가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유력 메달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6일 미국에서 열린 U-20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투포환에서 20.31m로 은메달을 획득한 그는 지난 5월 U-20 아시아 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는 20.65m로 U-20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대한육상연맹
한국투척의 간판 박시후가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유력 메달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6일 미국에서 열린 U-20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투포환에서 20.31m로 은메달을 획득한 그는 지난 5월 U-20 아시아 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는 20.65m로 U-20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대한육상연맹

◆ ‘단거리 선호’와 ‘포상 시스템’: 체질 개선을 이끈 두 개의 축

이러한 반등의 중심에는 세대적 변화와 대한육상연맹(회장 육현표)의 정책적 결단이 맞물려 있다. 특히 젊은 선수들이 단거리와 릴레이에서 잇따라 등장하면서, 한국 육상은 오랫동안 취약했던 스프린트 종목에서 새로운 경쟁력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실업팀의 안정적인 연봉 기반과 30대 중반까지 늘어난 선수 수명, 능력에 따른 스폰서십 유치와 스타성 확보는 육상을 ‘경제적 안정과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직업’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한육상연맹 역시 파격적인 신기록 포상금(성인 최대 2,000만 원, 100m 9초대 진입 시 2억 원), 기업 후원 기반의 꿈나무 장학사업, 어린 유망주들의 국제대회 파견 및 현지 적응 지원은 물론, 데이터와 과학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이들의 도전을 적극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즉각적인 반향과 화려함에 주목하는 이러한 흐름의 반작용으로, 오랜 인내와 고독한 훈련을 요하는 마라톤의 깊은 침체는 한국 육상이 끌어안아야 할 여전한 아쉬움이자 과제로 남았다.

'항저우 동메달리스트' 김태희가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두대회 연속 메달에 도전한다. 작년 6월7일 2025 코리아오픈국제육상경기대회 여자 해머던지기에서 64m70을 던지며 한국 신기록(종전: 64m14)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했다./대한육상연맹
'항저우 동메달리스트' 김태희가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두대회 연속 메달에 도전한다. 작년 6월7일 2025 코리아오픈국제육상경기대회 여자 해머던지기에서 64m70을 던지며 한국 신기록(종전: 64m14)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했다./대한육상연맹

◆ 아이치-나고야 D-31: ‘지속 가능한 부흥기’를 증명할 시험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은 그간의 체질 개선이 일시적 바람이 아닌 ‘지속 가능한 부흥’임을 증명해야 하는 중요한 무대다.

오랫동안 한국 육상은 전국체전 순위 확보와 지자체 실업팀의 직업적 안정성에 안주하며 '아시아 최정상이나 세계 무대와의 격차는 넘을 수 없다'는 보수적 관행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세계선수권·올림픽 기준기록 통과와 기록 경신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성장한 새로운 세대가 전면에 나서는 첫 아시안게임이다.

조엘진, 비웨사, 이재성, 서민준 등 젊은 단거리 주자들과 중거리 이재웅, 투포환 박시훈, 해머던지기 김태희 등 2000년대생 차세대 주자들이 대거 출전한다. 특히 조엘진, 비웨사, 이재성, 서민준, 김시온이 손을 맞추는 남자 400m 계주 등 릴레이 종목에서의 연속 메달 도전은 단지 개인의 돌출된 재능에 의존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장면이다. 이는 국내 육상의 유망주 육성 풀(Pool)과 연맹의 파견·전지훈련 시스템이 지속 가능한 선순환 구조로 정착했는지를 가늠하는 결정적 잣대가 된다.

또한, 우상혁의 금메달 도전, 이재웅의 중거리 경쟁력, 남자 400m 계주의 메달 도전 등 주요 종목에서의 성과와 함께 9년전 김국영이 세운 100m 한국기록(10초07) 경신 여부도 관심사다. 성적을 넘어 ‘기록에 대한 가치 인식 변화’가 현장에서 실제로 작용하고 있는지 검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국체전용 선수’에서 ‘세계 무대 도전자’로의 완전한 체질 전환의 장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번 대회의 진짜 성적표는 메달 숫자만으로 작성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선수가 자신의 기록을 넘어섰는지,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을 바라볼 수 있는 경쟁력을 보여줬는지가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지난 5월12일 제80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선에서 나란히 1,2위를 차지한 조엘진(오른쪽)과 비웨사가 기념촬영하고 있다. 둘은 9년전 김국영이 세운 100m 한국기록 10초07를 경신할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다./대한육상연맹
지난 5월12일 제80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선에서 나란히 1,2위를 차지한 조엘진(오른쪽)과 비웨사가 기념촬영하고 있다. 둘은 9년전 김국영이 세운 100m 한국기록 10초07를 경신할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다./대한육상연맹

◆ 2028 LA 올림픽을 향하여: 순위 싸움을 넘어 ‘기록 파괴’의 시대로

아이치-나고야는 끝이 아닌 과정이다. 한국 육상이 바라보는 진짜 지향점은 2028 LA 올림픽이다. 남자 100m 기준기록(10초00) 통과를 통한 본선 자력 진출, 400m 계주 결승 진출, 그리고 투포환 박시훈과 중거리 이재웅 등 다종목에서의 세계 무대 정조준이 최종 목표다.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전,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강국의 정상급 스프린터들과 직접 부딪히며 실전 경험과 랭킹 포인트를 쌓는 가장 중요한 전초전이다.

우상혁의 세계적 활약과 선수들의 SNS·유튜브를 통한 미디어 노출은 육상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팬덤 형성의 물꼬를 텄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보여줄 당당한 태도와 인상적인 레이스는 '비인기 종목'이라는 그늘을 벗어나, 육상이 경제적 안정과 명예를 동시에 가져다주는 매력적인 직업군임을 후배들에게 증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결국 이번 아시안게임은 한국 육상이 2021년 도쿄에서 시작된 긍정적 변곡점을 지나, 일시적인 반짝임이 아닌 지속 가능한 ‘기록 스포츠의 부흥기’로 접어들었는지를 검증하는 무대다. 메달 몇 개를 따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메달을 만들어낸 선수층과 시스템이 다음 세대에도 작동할 수 있느냐다.

‘전국체전 순위를 위한 육상에서 세계의 기록을 좇는 육상으로, 누군가의 돌출된 재능에 기대는 육상에서 여러 유망주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시스템 육상으로.’ 이번 나고야가 보여줘야 할 진짜 변화는 바로 이것이다. 한국 육상은 이제 가장 역동적이고 당당한 스포츠 콘텐츠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들은 나고야의 트랙을 출발점 삼아, LA의 더 높은 세계 무대를 향해 힘찬 스퍼트를 막 시작하고 있다.

지난 5월12일 제80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선에서 나란히 1,2위를 차지한 조엘진(오른쪽)과 비웨사가 기념촬영하고 있다. 둘은 9년전 김국영이 세운 100m 한국기록 10초07를 경신할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다./대한육상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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