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안이함이 초래한 대가, 또다시 단두대 위에서 '남의 손'을 바라보다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한국 축구가 또다시 우리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처량한 처지가 됐다. 홍명보 감독이 대회 전 "1차 목표는 32강 진출"이라고 선을 그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1무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던 트라우마가 너무 컸던 탓일까. 이날 한국은 '최소한 비겨서라도 32강에 가겠다'는 안이하고 소극적인 태도로 경기에 임했고, 그 심리적 위축과 소심함은 결국 치명적인 패착으로 이어졌다.
월드컵이라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사령탑의 무게감과 전술적 혜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증명한 한판이었다. 남아공의 휴고 브로스 감독은 경기 전 공언했던 대로 한국의 전술 패턴을 완전히 간파하고 나온 것으로 보였다. 중원 길목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한국의 빌드업을 무력화시켰다. 한국은 중앙이 막히자 전반전 이태석의 왼쪽 측면 오버래핑을 통한 돌파가 몇 차례 시도됐으나, 크로스의 정확도가 떨어지며 위협적인 장면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유기적인 팀플레이의 부재였다. 약속된 전술이 없다 보니 공을 가진 선수 주변의 동료들은 정적으로 멈춰 서 있었다. 공간과 패스 루트를 창출하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공을 돌리다 차단당하면, 곧바로 상대의 날카로운 역습으로 이어지는 위험한 장면이 무한 반복됐다. 조별리그 1, 2차전과 마찬가지로 수비 중심의 포메이션으로 나섰던 한국은, 지난 멕시코전처럼 결정적인 한 방을 얻어맞은 뒤 끝내 회복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패턴을 답습했다.

◆ 목적을 잃은 라인업 변화, 더 깊어진 고립무원
홍명보 감독은 1차전 체코전, 2차전 멕시코전과 달리 손흥민과 이재성을 벤치로 내리고 황희찬과 오현규를 선발 카드로 내밀었다. 그러나 '사람'만 바뀌었을 뿐 '전술 패턴'은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선발 멤버를 대거 교체한 전술적 의도나 목적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방향성이 불분명하다 보니, 전반 내내 최전방의 오현규가 볼을 잡은 횟수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손흥민 원톱 때보다 고립의 강도는 더 심했다. 전방 압박과 공격 전개가 동시에 위축되자, 오히려 남아공 선수들이 심리적 여유를 갖고 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 멍석을 깔어준 꼴이 됐다.
실제로 전반 내내 주도권을 쥔 남아공은 유기적인 경기력으로 네 차례나 위협적인 찬스를 만들어내며 한국을 압도했다. 반면 이날 한국의 플레이는 조직적인 팀플레이 없이 오직 선수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해 밀집 수비를 뚫으려는 무책임한 '해줘 축구'의 전형이었다.

◆ 선 실점 속에서도 주저한 벤치, '1차전 환상'에 갇힌 용병술
가장 우려했던 '비겨도 간다'는 안이함은 결국 참담한 화를 불렀다. 후반 들어 먼저 실점을 허용한 상태에서도 한국의 수비 중심적인 기조에는 변화가 없었다. 철저한 전술 부재의 방증이다. 리드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유기적인 포백 전환 등을 통한 중원 강화와 공격 지향적 변화 없이, 대회 전 '플랜 B'라 공언했던 스리백을 미련하게 고집하는 모습은 결국 이 팀에 플랜 A 자체가 부재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할 뿐이었다.
사실 후반 시작과 함께 황희찬 대신 손흥민을 투입해 오현규와 투톱을 형성하고, 이태석 대신 옌스 카스트로프를 투입해 측면에 변화를 주면서 초반에 잠시 활기가 도는 듯했다. 그러나 상대 윙어 타펠로 마세코에게 잇따라 단독 찬스를 허용하며 측면 밸런스가 무너졌고, 결국 후반 18분 역습 상황에서 마세코에게 통한의 선제 실점을 내주고 말았다.
당초 경기 초반부터 상대를 압도하며 시원한 대승을 기대했던 팬들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내내 끌려다니는 축구는 답답함 그 자체였다. 리드를 당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벤치가 공격을 강화하는 전술적 변화를 주지 않은 것은 무능인지, 아니면 머릿속 계산기가 완전히 멈춰 서 버린 탓인지 의문이다. 그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다른 계산이 있었던 걸까.
후반 28분 조규성을 투입한 선택 자체는 맞았으나, 공격 숫자를 늘려야 하는 시점에서 굳이 오현규를 빼고 전술적 구조를 유지한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홍 감독은 전술 체계의 변화 없이 사람만 바꾸는 이른바 '이름값 바꾸기식 용병술'에 지나치게 의존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벤치가 1차전 체코전 당시 손흥민을 빼고 오현규를 투입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던 '교체 성공의 환상'에 여전히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더는 물러설 곳도, 다음을 기약할 시간도 없는 마당에 보여준 이 해괴한 용병술은 결국 한국 축구를 '벼랑 끝 경우의 수'라는 초라한 단두대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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