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축구 경쟁력이 어디까지 통할지 확인하는 무대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은밀하지만 민첩하다. 눈 깜짝할 새 상대의 급소를 노린다. ‘닌자’의 이 습격 공식은 오늘날 일본 축구를 정의하는 데도 딱 맞아떨어진다.
2026 북중미 무대에 마침내 출격한 일본 축구는 그동안의 우승 호언이 단순한 객기가 아님을 증명했다. 15일(한국시간) 강력한 우승 후보 가운데 하나인 네덜란드와의 F조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일본은 후반 선제골을 내주고도 곧바로 균형을 맞췄고, 또다시 추가골을 맞아 패색이 짙던 상황에서도 경기종료 직전 불굴의 의지로 기필코 2-2 동점을 만들어냈다.
특히 순간적인 역습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골키퍼를 제외한 10명의 필드 플레이어가 상대 진영 그라운드로 넓게 펼쳐서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모습은 닌자 군단의 일제 습격 장면과 너무나도 빼닮아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각자 자로 잰 듯 포지셔닝을 지켜가며 상대 수비진의 간격을 강제로 벌리고 공간을 확보해, 누가 공을 잡더라도 바로 원터치 패스로 다음 플레이를 이어가는 역동성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것이 일본 축구의 핵심이다. 빠르다. 그리고 공이 오면 지체 없이 처리한다. 볼을 잡고 다음 동작을 고민하며 템포를 죽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미 머릿속에 주변 동료와 상대 수비의 간격, 움직임이 완벽하게 스캔되어 있어 공의 흐름을 결코 정지시키지 않는다. 과연 그들의 거침없는 질주는 어디까지 뻗어 나갈 것인가.
축구의 변방으로 취급받던 아시아 팀이 최근 1년 새 브라질과 잉글랜드 등 세계적인 거함들을 잇따라 격파했고, 지난 2022 카타르 월드컵 당시에는 ‘죽음의 조’에서 독일과 스페인을 연파하며 조 1위로 16강에 올라 전 대회 준우승팀 크로아티아와 승부차기 혈투를 벌였던 주인공. 바로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이 이끄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다. 우리는 지금 이들의 성장을 시샘과 경계, 그리고 부러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다.
유럽과 남미가 양분해 온 월드컵 역사상 아시아 대륙에서 우승을 논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런 대담한 목표를 스스럼없이 외칠 수 있는 그들의 저변이 내심 부럽다. 과연 그들이 마주한 현실적인 성적표는 무엇일까.

◆ 세계가 일본을 ‘체급 높은 다크호스’로 부르는 이유
FIFA랭킹 8위인 네덜란드가 평소 스타일과 다르게 이날 경기에서 양 윙백 미키 판더펜과 덤프리스의 공격지원을 최대한 자제하며 포백을 견고히 유지, 상당히 수비 지향적인 축구를 한 이유는 명확했다. 일본의 위험성. 특히 카운터의 치명적인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이 이번 대회 강력한 복병을 넘어 고평가를 받는 배경에는 역대 최고 수준의 ‘스쿼드 뎁스’와 전술적 연속성이 존재한다. 이번 대회에도 에이스 미토마 가오루(브라이턴)를 비롯해 미나미노 다쿠미(AS모나토), 엔도 와타루(리버풀) 등 핵심 선수들이 줄부상으로 낙마하는 대형 악재를 맞이했음에도 일본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들 이외에도 구보 타케후사(레알 소시에다드), 도안 리츠(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빅리그 주전급 자원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2018년부터 무려 8년간 모리야스 감독이 한 팀을 이끌며 다져온 전술적 연속성은, 단기 토너먼트에서 상대를 위협할 가공할 만한 자산이다. 4년전 카타르 월드컵 독일·스페인전 역전극의 발판이 되었던 실시간 전술 수정 능력은 이제 완숙기에 접어들었다. 지난 3월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확인했듯이, 경기 중 단 3분간 주어지는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마저 ‘전술적 타임아웃’으로 활용해 포백과 스리백을 유기적으로 전환하는 조직력은 현재 전 세계를 통틀어도 흔치 않은 수준이다.
이날 네덜란드전에서도 일본의 임기응변이 빛을 발했다. 전반에는 강팀 네덜란드의 공세를 차단하는 데 중점을 두고, 카운터어택을 노리는 스리백 기반의 5-4-1 파이브백 라인을 촘촘히 굳히는 수비 운영을 펼쳤다. 그러다 후반 중반 두 번째 골을 내주자마자 곧바로 포백으로 전환, 중원 숫자를 늘리고 공격을 과감히 강화해 내리 추격하며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 시스템의 성숙도: ‘능동적 공격’의 일본 vs ‘수동적 수비’의 한국
많은 국내 축구팬과 전문가들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는 대목이 바로 이 전술적 완성도다. 최근 한일 양국은 모두 3-4-2-1 포메이션을 가동했으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체질 자체가 달랐다. 한국의 스리백이 본선을 앞두고 수비 불안을 지우기 위해 급조된 ‘수동적 수비형 시스템’에 가깝다면, 일본의 스리백은 오랜 시간 약속된 ‘능동적 공격형 시스템’이다.
특히 윙백 운용에서 차이가 극명하다. 한국은 주발 매칭(오른발잡이 우측, 왼발잡이 좌측)에 기반한 정통파 윙백들이 터치라인을 타고 직선적인 ‘직진’ 밖에 하지 못한다. 공격의 방향이 측면 외길로만 단순해지니, 상대 수비는 중앙에만 촘촘하게 뭉쳐 있으면 그만이다. 결국 우리 미드필더들은 상대의 빽빽한 수비 벽에 갇혀 공을 받아줄 길목이 막힌 채 외롭게 고립되고 만다.
반면 일본은 도안 리츠나 나카무라 케이토, 이토 준야 등 유럽 빅리그 수준의 전문 윙어들을 윙백에 배치하되, 공격 시 이들을 중앙으로 좁혀 들게 하는 ‘인버티드’ 형태로 활용한다. 단순히 정직한 측면 오버래핑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중앙으로 방향을 꺾어 들어와 주발(반대발)을 활용해 직접 타격하는 효율적인 공격 옵션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전 후반 12분 극적인 1-1 동점골 역시 중앙으로 침투한 왼쪽 윙백 나카무라가 오른발로 감아 찬 번개 같은 슛이 골문 구석을 뚫어낸 결과였다.
전술적 철학의 격차는 공수 전환 속도에서도 벌어진다. 일본은 설령 낮은 점유율(30%대)을 기록하더라도 수비 블록을 촘촘히 유지하다가, 상대가 틈을 보이면 조직적 공간 침투를 통해 순식간에 전방에서 수적 우위를 만든다. 네덜란드라는 대어를 상대로 보여준 지능적인 공간 요리법, 이것이 한국과 일본 축구가 마주한 전술적 성숙도의 결정적 차이다.

◆ 우승 확률 1.1%, 가로막는 구조적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축구협회가 외치는 "월드컵 우승"이라는 구호는 냉정하게 말해 현실성이 떨어진다. 통계 매체들이 점친 일본의 최종 우승 확률은 단 1.1% 안팎이다. 단판 토너먼트가 주는 중압감 속에서 일본은 두 가지 구조적 한계에 부딪힐 확률이 높다.
첫째는 ‘9번 스트라이커의 무게감’이다. 음바페나 비니시우스처럼 판 자체를 홀로 깨부술 수 있는 월드클래스 크랙이나 확실한 해결사가 없다 보니, 지배하는 경기를 하고도 결정력 부족으로 발목을 잡히는 고질병이 도질 수 있다. 네덜란드전 역시 최전방 우에다의 존재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한국이 가진 압도적인 개인 체급, 즉 손흥민과 같은 마스터피스가 일본의 탄탄한 전술적 시스템 위에 결합했다면 어땠을까. 일본이 한국을 은연중에 부러워하는 이유도 전반적인 시스템은 뒤처졌을지언정 꾸준히 ‘게임 체인저’급 인재가 나온다는 점에 있다.
둘째는 ‘피지컬의 한계’다. 토너먼트 후반부로 갈수록 정교한 패스 축구는 남미와 유럽 강호들의 거친 압박과 세트피스 높이 싸움에 잠식당하기 쉽다. 이날 역시 후반 6분 반 다이크에게 선제골을 내주는 장면에서처럼 네덜란드의 높이와 힘에 눌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 현실적 목표는 사상 첫 ‘원정 8강 안착’
현실로 돌아와, 이번 북중미 월드컵에서 일본 축구가 기대하고 달성해야 할 성적표는 우승이 아닌 ‘사상 첫 원정 8강 진출 및 안착’이다.
첫 경기에서 조1위 후보 라이벌 네덜란드를 상대로 완성도 높은 스리백을 무기로 짜임새 있게 승점을 쌓아 올릴 만큼, 일본의 F조 1위 진출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있다. 만약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입해 대진운을 아군으로 삼는다면, 오랜 기간 다듬어온 시스템의 힘으로 오랜 염원이었던 원정 8강 벽을 깨부수는 시나리오는 충분히 가시권에 있다.
스타플레이어의 ‘개인 기량’에 기대어 초라한 전술을 가리기에 급급한 한국 축구와 달리, 월드클래스 크랙의 부재를 ‘정교한 시스템’으로 메워가며 매우 높은 곳까지 전진해온 일본 축구. 그 격차가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첫 경기부터 강렬하게 증명된 이번 월드컵은 '시스템'으로 무장한 아시아 축구의 경쟁력이 과연 세계 무대 어디까지 통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흥미로운 시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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