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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 33주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황덕준의 크로스오버]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에서 차량이 폭발과 함께 시커먼 연기와 불길에 휩싸여 있다./National Geographic 유튜브 캡처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에서 차량이 폭발과 함께 시커먼 연기와 불길에 휩싸여 있다./National Geographic 유튜브 캡처

[더팩트 | 황덕준 재미 언론인] 1992년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은 시커먼 연기와 불길에 휩싸였다. 과속 차량을 추격해 붙잡은 뒤,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을 무차별 폭행한 경찰들의 영상이 퍼지면서 미국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백인 3명과 히스패닉계 2명 등 경찰 5명이 법정에 섰지만, 배심원단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정당성을 잃은 사법 판단에 분노한 흑인 사회는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폭동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코리아타운은 그 분노의 중심에 놓였다.

LA 한인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아가던 중심 상권은 무정부 상태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불타고 약탈당했다. 6일간 이어진 사태로 63명이 사망하고 2300명 이상이 다쳤으며, 1만 2000여명이 체포됐다. 당시 피해액은 10억 달러에 달했고, 이 가운데 약 40%인 4억 달러가 한인 비즈니스의 손실이었다.

LA폭동 당시 한인타운 버몬트 길을 차단하고 있는 경찰차./Society of US Intellectual History제공
LA폭동 당시 한인타운 버몬트 길을 차단하고 있는 경찰차./Society of US Intellectual History제공

33년이 지난 2025년 4월 29일. LA 어디에서도 이 날을 기억하거나 되새기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LA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주류 언론도, 시 당국도, 커뮤니티 단체들도 침묵했다. 한국어 매체 한 곳이 "아무런 기념 행사조차 없다"는 기사를 냈고, 그 영향으로 LA한인회가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폭동은 단지 ‘흑인 대 백인’이나 ‘흑인 대 한인’이라는 갈등 구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공권력의 오남용,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 인종 간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연대의 부재를 복합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특히 이방인으로서의 아시아계 이민자들, 그중에서도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 사회 안에서 ‘이방인’이 놓인 자리, ‘중간자’로서의 위험한 위치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당시 미국은 ‘치안’이라는 이름으로 공권력의 폭력을 용인했고, 시민들은 그 구조적 폭력에 맞서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이 충돌의 본질은 충분히 기록되지도, 교육되지도 않았다.

미국 교과서에는 4·29 LA폭동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LA 시나 미국 연방 차원에서 공식적인 기념일조차 지정되어 있지 않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언론은 흑인 폭동에 휘말려 피해 본 한인의 입장을 반복 보도했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깊이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LA 한인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아가던 중심 상권은 무정부 상태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불타고 약탈당했다. 6일간 이어진 사태로 63명이 사망하고 2300명 이상이 다쳤으며, 1만 2000여명이 체포됐다./ National Geographic 유튜브 캡처
LA 한인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아가던 중심 상권은 무정부 상태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불타고 약탈당했다. 6일간 이어진 사태로 63명이 사망하고 2300명 이상이 다쳤으며, 1만 2000여명이 체포됐다./ National Geographic 유튜브 캡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것을 반복하게 된다"고 했다.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는 더 단호하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이 말들은 단지 과거의 교훈이 아니라, 오늘날의 무관심에 던지는 경고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잊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가? 지난 2020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 아래 미국 전역에서 분노가 다시 폭발했다. 표현 방식은 달라졌지만, 분노의 본질은 여전히 같았다. 공권력은 여전히 약자에게 폭력적이었고, 사회구조는 개선되지 않았다.

아시아계를 겨냥한 혐오범죄의 증가, 빈곤층을 향한 과잉 단속 등은 1992년과 닮은 오늘의 풍경이다. 기억은 단지 ‘잊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기억은 공동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억은 불편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하는 사회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폭동은 끝났지만, 불평등은 계속되고 있다. 폭력은 줄었을지 모르지만,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1992년 4월 29일을 어디에, 어떻게 보관해두고 있는가? 오늘이 지나면, 다시 이 날은 잊혀질 것이다. 그러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지만, 만에 하나 또 다른 화염과 시커먼 연기가 도시를 뒤덮을 때 우리는 그제서야 "왜 아무도 그때를 기억하지 않았는가"라고 되물을 것인가.

LA 한인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아가던 중심 상권은 무정부 상태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불타고 약탈당했다. 6일간 이어진 사태로 63명이 사망하고 2300명 이상이 다쳤으며, 1만 2000여명이 체포됐다./ National Geographic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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