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이 설정한 방향성과 다른 목소리는 '틀렸다'는 선민의식
정치인과 언론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고, '네 편' 공격
[더팩트ㅣ허주열 기자]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의 야당, 언론 등에 대한 '적의(敵意)'가 점점 심해지는 모양새입니다. 국정운영의 키를 쥔 자신들이 내린 결정과 벗어나는 주장을 하면 싸워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공세를 퍼붓습니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확실한 '피아식별'(彼我識別)에는 우리가 한 결정은 무조건 옳다는 '선민의식'(選民意識)이 느껴집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비판하는 야당을 겨냥해 "1+1을 100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라며 바보 취급을 한 뒤 "이런 세력과는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야당 정치인도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국민의 대표입니다. 어찌 보면 야당 정치인을 싸워야 할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그들을 지지한 국민도 적으로 규정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들립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적이 너무 많습니다. 지난달 31일 발표된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4개 사의 전국지표조사(NBS) 결과를 보면 윤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 평가'는 33%, '부정 평가'는 59%로 조사됐습니다. 정당지지도는 국민의힘 32%, 더불어민주당 28%, 지지 정당 없음 33%였습니다(28~30일 만 18세 이상 남녀 1001명 휴대전화 전화면접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국민 과반이 국정운영을 잘못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도 과반이 넘는 상황에서, 그런 평가를 하는 국민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지도자의 인식이라고 평가받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현 야당과의 협치는 없다고 사실상 선을 그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협치, 협치 하는데 새가 날아가는 방향은 딱 정해져 있어야 왼쪽 날개, 오른쪽 날개가 힘을 합쳐가지고,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가 힘을 합쳐 가지고 성장과 분배를 통해 발전해 나가는 것인데, (야당은) 날아가는 방향에 대해서도 엉뚱한 생각을 하고, 우리는 앞으로 가려는데, (야당은) 뒤로 가겠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윤 대통령은 "우리가 타협이라는 건 늘 해야 하는 것"이라면서도 "정치 영역에서의 타협은 근본적으로 어떤 가치, 어떤 기제를 가지고 우리가 할 것인지, 그거부터가 우리 스스로 국가 정체성에 대해서 성찰을 하고 우리 당정에서만이라도 우리가 우리 국가를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확고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사건건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야당은 배제하고, 30%대 국민 지지를 받는 당정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됩니다.
대통령의 이런 발언에 국민의힘 의원들은 박수와 환호로 동조한다는 인식을 드러냈습니다. 내년 4월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공천에 지대한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윤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동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내년 총선이 끝날 때까지는 당·정·대가 이런 기조로 야당을 대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국민을 통합하고,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것도 대통령의 역할입니다. 윤 대통령 스스로도 지난해 12월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의 '국민통합 추진 전략 및 성과 보고회'에서 "사회 갈등과 분열을 줄이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해 나가는 것이 정말 국가 발전과 위기 극복에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 발언을 체감할 만한 실질적인 노력은 없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이번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언론을 겨냥한 상식적이지 않은 메시지도 내놨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금 국회에서 여소야대에다가 언론도 전부 야당 지지 세력들이 잡고 있어서 그래서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보수 정권에 우호적인 시각을 담아 보도하는 신문과 방송사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국민이 얼마나 될까요.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언론의 기본적인 역할임에도 비판을 '욕'으로 여기는 대통령의 인식에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자유'에 '언론자유'는 포함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대통령과 여권의 최근 메시지는 9월부터 시작하는 정기국회, 그 이후 총선 국면에서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극심한 정쟁'만 펼쳐질 것이라고 보여주는 예고편과 같아 보입니다. 경기 침체와 이에 따른 어려운 민생을 살피고, 사회 곳곳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국회의 입법 조력이 필수적입니다. 노동·교육·연금 개혁 등 윤석열 정부의 3대 개혁도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협조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당정의 행보에 야당도 윤석열 정부가 만든 '퇴행의 시대'를 다시 정상적으로 되돌리겠다면서, 맞불을 놓고 있습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8월)31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오늘부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무능·폭력 정권을 향해 '국민 항쟁'을 시작하겠다. 민주주의 파괴에 맞서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 사즉생의 각오로 민주주의 파괴를 막아내겠다"며 무기한 단식 투쟁에 돌입했습니다.
작금의 정치 상황은 국민 모두에 불행한 일입니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도, 지지하지 않는 국민도 우리 국민입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국민도 지지하지 않는 국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다수 국민은 복잡다단한 삶 속에서 정치적 네 편과 내 편을 가릴 이유도 없고, 실제로 구분할 수도 없습니다. 국민 삶과 동떨어진 정치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패트릭 J. 드닌 미국 노터데임대학 정치학 교수는 저서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에서 "자유주의는 '더 완전' 해질수록 내적 논리가 더 분명해지고, 자기모순이 더 드러날수록 자유주의 주장의 변질인 동시에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실현인 병폐들이 생겨났다"며 "공정성을 증진하고, 문화와 신념의 다원성을 옹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유를 확대하겠다던 정치 철학이 실제로는 엄청난 불평등을 낳고 균일성과 균질성을 강요하고, 물질적 정신적 퇴폐를 조장하고,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특히 드닌 교수는 선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현재에 대해 "시민들이 정부에 맞서 그들이 직접 지도자와 대표로 선출한 '기득권층'과 정치인들에 맞서 거의 반란을 일으킬 지경"이라며 "절대다수 시민은 자국 정부를 멀리 있고, 응답하지 않는 기구, 부자들의 수중에 있고, 오로지 유력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통치하는 기구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윤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핵심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드닌 교수가 진단한 실패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길을 그대로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sense83@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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