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라는 정자도 올리지 않겠다'던 국정원장의 이슈 파이팅을 보며
[더팩트ㅣ이철영 기자] "입 다물고 있는 것이 본인한테 유리하다." "나는 정치9단이라 다 보인다."
얼핏 들어도 경고에 가깝다. 좀 무섭기도 하다. 경고하는 주체는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 수장인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고, 경고 대상자는 야권 유력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다. 이력만 보면 '용호상박'에 가깝다.
두 사람은 최근 '고발 사주 의혹'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발단은 이렇다. 제보자 조성은 씨는 지난달 11일 서울의 모 호텔에서 박 원장을 만났다.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여기에 윤 전 총장 측은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 측근 인물이다.
박 원장과 조 씨는 두 사람이 만났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고 부인했다. 윤 전 총장 측은 수사로 밝히자고 강경한 태도다. 조 씨가 박 원장을 만나기 전날인 10일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 자료 106건을 다운로드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의혹을 낳는다. 조 씨가 박 원장과 상의했을 가능성에 대한 추측이다. 야권에서 고발 사주 의혹을 '박지원 게이트'라고 주장하는 근거다.
박 원장은 발끈했다. 본인을 건드렸다는 것이 이유다. 그런데 박 원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조 씨와 고발 사주 의혹에 대해 논의한 바 없으며, 홍 의원 측 사람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 인터뷰 내용 중 흥미로운 것은 그가 윤 전 총장을 향해 강한 경고를 했다는 점이다.
'윤유진 전 용산세무서장 문서를 제가 국회에서 맨 먼저 터뜨렸다. 그 자료를 다 가지고 있다. (국정원이) 정치 개입하지 않는다는데, 왜 잠자는 호랑이 꼬리 밟느냐. 내가 국정원장하면서 정치개입 안 한다고 입 다물고 있는 것이 본인한테 유리하다.'
윤 전 총장을 향한 경고성 메시지다. 그런데 내용을 볼 때 국정원장으로서 정치개입을 안 하는 것인지는 좀 의문이다. 거기다 인터뷰 마지막엔 '나는 정치 9단이라 다 보인다. 그렇지만 말하면 국정원법 위반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국정원장이라 말을 못 한다. 내가 밖에 나가서 방송 등등에서 말하고 다니면 누가 손해냐?'라고 했다.
박 원장은 정치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다분히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고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난 2020년 7월 3일 국정원장 후보자로 내정된 직후 '앞으로 제 입에서는 정치라는 정(政)자도 올리지도 않고, 국정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며 국정원 개혁에 매진하겠습니다. SNS 활동과 전화 소통도 중단합니다'라고 했다. 이 약속과도 배치된다.
대선 국면에서 정치권을 강타한 의혹에 박 원장 이름이 거론됐으니 해명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박 원장은 위치에 대한 직시가 필요하다. 박 원장의 계속된 인터뷰와 해명, 그리고 야권 유력 대선주자인 윤 전 총장을 향한 경고는 국정원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던 국내 정치개입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원장은 이번 논란과 관련한 해명은 공식적인 보도자료, 그리고 국회 정보위원회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박 원장은 논란의 중심에 직접 뛰어들어 정치권과 사실상 정쟁을 하는 모양새가 됐다.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해 얽힌 누구도 비호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장의 주연급 이슈파이팅이라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은 정부조직법상 유일한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국내 최고의 정보기관으로 정치적 중립 의무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조직이다. 문 대통령이 국정원을 향한 당부도 '정치적 중립'이다.
문 대통령의 이런 당부를 고려할 때 국정원장 자신을 '정치 9단'이라고 언급한 것은 과연 합당할까. 국정원장이 현실 정치인 박지원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국정원의 원훈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다. 국정원 조직원의 헌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름 없이 오직 주어진 임무에 충실합니다'이다. 자신을 '정치 9단'이라며 논란 한복판에 선 박 원장은 국정원의 원훈과 과연 부합하고 있나 자문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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